“아직 외국인만 봐도 심장이 떨린다”
한글날이었던 지난 9일, 박 아무개 씨(여·28)는 일행과 함께 술에 취한 외국인에게 ‘봉변’을 당했다. 만취한 외국인이 길을 가고 있던 박 씨 일행에게 주먹을 휘둘렀던 것. 박 씨는 뒤통수를 한 대 맞고, 현장에 있던 또 다른 여성은 얼굴을 가격당했다.
박 씨는 업무 차 동료인 서 아무개 씨(여·27), 전직 외교관 한 아무개 씨와 함께 저녁을 함께 하고 2차 장소로 가기 위해 택시에서 막 내린 참이었다. 대로변에서 술에 취한 외국인 A 씨와 B 씨가 비틀거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옆에는 한국인 남성 C 씨가 이들을 따라가며 이들의 행동을 제지하고 있었다. 위협적인 모습에 박 씨 일행은 몸을 피해 주한 프랑스 대사관 앞 골목에서 또 다른 일행을 기다렸지만, 이들은 기어이 박 씨 일행에게 다가와 시비를 걸었다. 옆에서 C 씨와 B 씨가 만취한 A 씨를 말렸지만 일은 터지고 말았다.
어디선가 신고를 받고 현장에 경찰차가 출동했고, 외국인 남성 두 명은 경찰을 보고 도주했다. 문제는 이들의 ‘만행’이 박 씨 일행을 폭행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술자리에서 C 씨에게 성기를 꺼내 보이며 성희롱까지 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지원요청을 받고 출동한 경찰은 인근에 있는 아파트 단지로 숨은 A 씨를 찾기 위해 인근을 샅샅이 뒤졌다. 자정이 다가오는 시각, 경찰과 소동을 빚은 후 A씨는 사지가 붙들려 경찰에 연행됐다. 검거 과정에서 난동을 부렸고, 출동한 충정로 지구대 소속 경찰관의 왼쪽 어깨를 물어뜯기까지 했다.
A 씨와 B 씨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중에도 자신이 외교관임을 밝히지 않았다. 추후에 신분증을 확인하는 과정에서야 외교관 신분이 들통 났다. 박 씨의 분통을 터지게 하는 일은 더 있었다. 사건을 담당하는 경찰은 외교관 신분증을 확인한 뒤 “외교관은 면책특권이 있어 입건은 되지만 처벌은 불가능하다. 민사소송을 통해 피해보상을 받는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 것. 박 씨는 “맞은 사람은 있는데 가해자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냐. 그렇다고 기껏해야 수십만 원 수준의 보상금 받아내자고 민사소송을 준비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며 억울해 했다.
이후 외교관은 박 씨 일행을 찾아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벌어진 일이다. 소맥 문화가 익숙지 않아 술에 많이 취했다”라며 사과했다. 하지만 일체의 피해보상 방안은 언급하지 않았다. 해당 외교관 A 씨는 현재 견책 수준의 징계를 받고 본국 송환을 대기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 씨처럼 외교관에게 피해를 입고도 가해자에게 처벌을 가할 수 없는 일은 매년 한두 건씩 일어난다. 우리나라 형법에는 외교관에 대한 폭행, 협박, 명예훼손에 관해서는 가해자에게 철저하게 죄를 묻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 규정은 없어 면책특권을 방패삼아 범죄를 저지르고도 ‘배째라’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는 것.
2009년에는 동유럽권 국가의 대사가 음주상태에서 관용차를 몰다가 차량 두 대를 연달아 치고 달아난 일이 있었다. 이 사고로 택시기사가 부상을 입었으나, 해당 대사는 음주측정도 거부하고 귀가 조치됐다. 2012년에는 주한 일본대사관 주재관이 만취상태로 택시기사의 멱살을 잡고 주먹질을 하고, 발로 눈을 걷어차는 등의 폭행을 저질렀다. 사건은 서울 서부지검에 송치됐으나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2013년에는 주한 피지대사 부부가 이태원의 한 술집에서 술을 먹다가 술집의 애완견 두 마리를 훔쳐 달아난 일이 발생했다. 부부는 경찰에 “주인이 개를 주는 줄 알고 데려갔다”고 혐의를 부인하는 동시에 면책특권을 내세워 경찰 출석을 거부했다.
지난해에는 주한 체코대사가 타고 있던 차량이 음주 단속에 걸렸다가 경찰과 실랑이를 벌인 사건이 발생했다. 운전자는 대사가 타고 있으니 면책특권을 적용해달라며 음주 측정을 거부했고, 체코 대사는 실랑이를 보다가 갑자기 차량 뒷문을 열어 2차선으로 주행하던 차량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파손되기도 했다. 결국 체코 대사 측의 차량은 귀가 조치됐다.
폭행 등의 중범죄 외에도 교통법규 위반과 같은 경범죄도 비일비재하다. 지난 3년간 외교차량이 서울 시내 무인 단속 카메라에 적발된 횟수는 154건으로, 러시아와 중국, 미국, 몽골 순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 경찰 관계자는 “운전자는 한국인인 경우가 많아 범칙금을 발부하긴 한다. 하지만 내지 않아도 그만이긴 하다”고 말했다.
서울 시내에서 대사관이 가장 많이 밀집한 곳은 용산구와 중구다. 현장에서 겪는 고충도 적지 않다. 서대문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공무집행방해를 해도 사실상 제재할 방안이 마땅찮다. 관련 사건이 들어오면 외교부에 먼저 통지를 해야 하고, 외교부는 신원확인을 거쳐 ‘비엔나 협약으로 인한 면책특권이 적용된다’고 안내한다. 골치 아프니 빨리 검찰 송치를 해버리는 편이 낫다”고 밝혔다.
용산구의 한 파출소의 한 관계자 역시 “막말로 살인을 저질러도 우리나라에서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본국에 송환돼서 자기 나라 법의 제재를 받겠지만, 우리나라 국민 입장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는 거다. 미군의 범죄가 문제가 많이 됐는데, 외교관은 그 직위 때문에라도 엄벌에 처하는 게 맞지 않나”라고 꼬집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외교관 ‘면책특권’은? ‘비엔나협약’ 공방 부글부글 외교관이 갖는 특권은 대표적으로 신체불가침, 불체포 특권, 재판권 면제, 증언거부, 과세면제 등이 있다. 모든 특권은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으로 규정돼 국제적으로 준수되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176개국이 비엔나협약으로 각국에 파견된 외교관에게 의무와 임무에 맞는 특권을 보호하고 있다. 외교관에 대한 특권은 기원전부터 시작돼 관습법으로 전 세계에서 지켜져 왔다. 이를 1961년 국제연합이 오스트리아 비엔나 회의에서 채택해 성문화했다. 우리나라는 1971년 발효돼 각국에 파견된 영사들이 보호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외교관이 연루된 크고 작은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비엔나 협약을 두고 공방이 벌어지기도 한다. [서] |
우리나라 외교관 추태 ‘윤창중 성추행’ 최악 외교참사 윤창중 전 대변인. 2012년에는 뉴질랜드 오클랜드 영사가 음주 상태에서 성추행을 해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문제를 일으킨 총영사는 회식자리에서 여직원들과 번갈아가며 춤을 추면서 성추행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총영사는 혐의를 적극 부인했으나 외교부는 책임을 물어 보직해임했다. 같은 해 태국에서는 한국대사관 소속 외교관이 현지 대학 교수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태국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일하는 한국인 여교수가 업무협조 요청을 위해 대사관 직원을 만난 자리에서 해당 외교관은 수차례 교수의 몸을 만지는 등의 성추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에는 ‘상하이 스캔들’이 터져 한동안 외교가가 떠들썩했다. 중국 상하이에 주재하는 한국 관료 5명이 덩신밍이라는 30대 여성의 ‘미인계’에 넘어가 외교기밀을 제공했다. 덩 씨는 외교관, 정부 관계자들에게 접근해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국내 정부 주요 인사와 여권 관계자들의 개인정보를 받았다. 당시 덩 씨는 자신을 덩샤오핑의 손녀로 소개하며 중국의 유력인사인 것처럼 속였다. 우리나라 외교관들은 덩 씨를 둘러싸고 치정 싸움까지 벌인 것으로 알려져 국제적 망신을 당한 바 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