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어깨 부상. 만일 그때 이승엽이 계속해서 투수를 고집했더라면 2~3년 빌빌거리다가 지금쯤 대구 시내에서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물론 백승호 코치의 권유도 있었지만 결국 판단은 이승엽의 몫이었다.
노장진. 그는 한때 연구대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학창시절에 기합이 무서워 도망다닌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사이다. 하지만 그는 프로에 와서 그것도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운동이 싫다고 도망다닌 적이 있다. 빙그레 시절엔 시즌중에도 연락을 끊고 잠적하곤 했다.
구단 직원이 어렵게 수소문해서 데려오면 어느 순간에 또 다시 ‘하이방’을 놨다. 구단이 오죽하면 공개수배(?)까지 했겠나. 그리고 야구가 싫다며 자원해서 현역으로 입대했다. 제대해서 결국 삼성으로 트레이드되고 거기에서도 특별관리대상(?)선수로 찍혀서 한때는 유중일 코치와 룸메이트도 했다. 지금은 가정도 꾸리고 열심히 한 덕분에 삼성의 기둥투수가 됐다.
이상훈의 전적도 꽤나 화려했다. 대학시절 별명이 ‘빠삐용’이었다. 바퀴벌레를 잘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탈출의 귀재’라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러나 이상훈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탈출이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쪽방 같은 데서 살던 이상훈은 어머니를 잘 모시려면 한가하게 야구만 할 수 없다며 돈 벌어야겠다고 해서 실제로 아르바이트까지 했다. 잡아다 놓으면 도망가고 또 잡아다 놓으면 탈출하곤 했다. 그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남수 감독과 필자를 포함한 4학년생들이 기합도 줘보고 달래보고 하면서 설득을 했다. “진정 효도하는 길은 프로 가서 계약금 많이 받아 통장을 선물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결국 이상훈은 해냈다. 당시에는 파격적인 1억원의 계약금을 받아 어머니께 집을 장만해 드렸다. 이상훈은 워낙 어렵게 자라서 지금도 천원 한 장이라도 낭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은인과도 같은 필자한테는 매달 월급에서 10%씩 떼서 송금해야 하지 않을까. 이 3명의 선수뿐만 아니라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고비가 있다. 그 고비를 과감하게 또는 현명하게 대처하는 자만이 진정한 스타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SBS 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