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년 2월 당시 올림픽 축구대표팀의 허정무 감독 과 정해성 코치가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 ||
대부분 감독들은 자신이 가장 아끼고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코치들을 선호한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프로 스포츠계엔 ‘사단’이란 이름으로 형성돼 있는 ‘조직’이 눈에 띈다. 학연과 혈연, 남다른 인연 등을 통해 맺어진 사제지간이 결국엔 ‘사단’으로 발전된 형태. 프로축구와 프로야구에서 소문난 ‘사단’의 면면과 그 사연을 알아보기로 한다.
허정무 전 대표팀 감독과 정해성 전 대표팀 코치는 축구계에서 유명한 ‘바늘과 실’로 통한다. 허 감독이 가는 팀마다 정 코치가 그림자처럼 함께 움직이며 허 감독 밑에서 코치 수업을 받아왔던 것. 두 사람의 인연은 허 감독이 포항 사령탑을 맡으면서부터 시작됐다. 정 코치는 94년 겨울에 허 감독을 만나 포항 코치직을 제의받았고 95년부터 1년간 허 감독 밑에서 코치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다 그해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허 감독이 물러나자 정 코치는 구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 감독을 따라 코치직을 내놓게 됐다. 이 과정에서 정 코치는 계약 위반으로 포항 구단에 위약금을 물어줬을 만큼 허 감독과의 신의를 지켰다.
96년 박종환 감독이 대표팀을 맡게 되자 6개월간 박 감독 밑에서 트레이너로 다시 활동하게 된 정 코치. 그러나 전남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허 감독이 다시 ‘러브콜’을 하자 정 코치는 박 감독의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대표팀을 나와 전남으로 ‘님’을 향해 미련 없이 떠났다. 그후 허 감독이 올림픽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면서 대표팀 수석 코치 자리를 맡게 됐는데 허 감독은 당시 프로 경기중 심판 구타 문제로 11게임 정지에다 4백만원의 벌금이란 엄청난 징계를 받고 있던 정 코치를 위해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코치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놓고 기다리는 신뢰를 보여줬다.
지난 월드컵 때 정 코치는 진로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었다. 오랫동안 밀월 관계를 유지했던 허 감독의 그늘을 떠나야 했기 때문. 그 일에 대해 정 코치는 월드컵이 끝난 후 기자에게 이런 심정을 고백한 적이 있었다. “막상 허 감독 곁을 떠나겠다고 말하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외국인 감독 밑에서 축구를 배우고 싶은 욕심 때문에 택한 결정이었는데 무척 섭섭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분을 배신한 게 아니었다.”
대구 시민구단 창단팀 감독으로 새출발하는 박종환 감독도 축구 인생만큼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폭넓은 사단을 형성하고 있다. 34년간의 지도자 생활 동안 숱한 코치와 선수들을 만났고 지금은 그때 인연을 맺은 제자들이 아마와 프로 축구계의 ‘기둥’으로 활동중이다. 최만희(부산 아이콘스) 하상섭(건국대) 최인영(울산현대) 하성준(숭민원더스) 백종철(대구영진전문대) 등 현역 지도자만 31명.
박 감독의 특징은 사제지간의 인연을 가족 관계 못지 않게 중요시한다는 것. 한번 감독과 코치의 인연을 맺은 제자와는 어떤 일이 생겨도 그 인연을 이어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박 감독이 신생팀 감독으로 내정됐다는 소문이 알려지면서 그가 뽑을 코칭스태프가 어떤 인물로 구성될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박 감독이 부르기만 한다면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갈 ‘일편단심’이 한두 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은 LG의 김성근 감독-이홍범 코치(위)와 기아 김성한 감독-이상윤 코치(아래). | ||
그후 쌍방울 감독으로 새롭게 문패를 바꿔 단 뒤에는 아예 이 코치를 집 안 깊숙이 끌어들였다. 이번엔 주장이 아닌 코치로 본격적인 동거 체제에 들어갔다. 감독과 코치로는 6년째, 코치와 선수로는 무려 20년째 인연을 맺고 있는 셈.
김 감독의 철학 중 하나가 ‘그가 떠나기 전엔 버리지 않는다’이다. 즉 인연을 중시하는 스타일. “때론 그 인연을 지키느라 내가 손해보고 욕먹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먼저 버릴 수는 없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이 코치는 김 감독의 라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알게 모르게 주위의 견제를 받을 때도 있다고 한다. 다른 코치들이 정작 이 코치 앞에서는 김 감독에 대한 불만이나 험담을 늘어놓지 못하기 때문. 기자가 “만약 김 감독이 다른 팀으로 옮겨갈 경우 그때도 같이 갈 것이냐”고 물었다. 이 코치는 “불러만 준다면 당연히 김 감독 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기아의 김성한 감독은 일천한 감독 경력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끌고 있는 코치들을 감히 ‘김성한 사단’이라고 부를 만큼 대단한 맨파워를 자랑한다. 워낙 개성이 강하고 색깔이 뚜렷하다보니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코치들한테는 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게 중요했다.
그렇다고 모두가 김 감독 앞에서 설설 기는 건 아니다. 이상윤 투수 코치는 드물게 김 감독과 ‘맞장’ 뜨는 걸 꺼리지 않는다. 한밤중 코치들을 집합시켜 잔뜩 군기를 주는 험악한 분위기에서도 할 말 다하는 사람이 이 코치다.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가 험악하지만은 않다. 해태에서 선수 생활하는 동안 쌓아온 세월만큼 길고 깊다. 언뜻 보면 물과 기름 같아도 적절한 타이밍에서 알맞게 섞일 줄 아는 김성한-이상윤 커플이야말로 경제적인 사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 야구계에는 SK 강병철 감독이 사임하기도 전에 선동열 KBO 홍보위원의 감독 등극설이 관심을 모았다. 결론은 사실무근으로 드러났지만 항간에선 ‘선동열 사단’이 깃발을 꽂으려다 막판 협상 과정에서 없던 일로 결론 났다는 소문이 꽤 신빙성있게 나돌았다.
수석코치 한대화, 타격코치 이순철, 투수코치 조계현 등이 ‘선동열 사단’에 이름을 올렸던 코치 후보들이다. 해태 시절 동고동락했던 선후배들이 ‘사단’을 형성하려다 무산된 케이스인데 정작 당사자들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
조계현은 자신이 ‘선동열 사단’으로 거론된 데 대해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롯데 코치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고 구단에서도 좋은 반응을 나타내 기다리고 있다가 얼마전에서야 무산된 사실을 알았다는 것. “백인천 감독 밑에서 코치 수업을 받고 싶었다. 일본에서 활동하셨고 카리스마도 있고 배울 게 많은 분 같아서 내심 기대를 했는데 구단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한편 분명 ‘사단’을 이끌고 있을 것 같은 김응용, 차범근 감독은 특별한 사단을 형성하지 않고 있다. 김 감독은 ‘우승 제조기’라는 개인적인 타이틀은 화려하지만 모든 걸 걸고 쫓아다닐 만한 인물이 눈에 띄지 않고 차 감독은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활동하는 코치들 외에는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이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걸 싫어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