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금지약물을 먹은 적이 없다”고 외쳐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라는 ‘물증 없는 심증 굳히기’에도 지쳐 있었다. 그래서인지 인터뷰 요청에 송곳을 세운 듯한 날카로운 반응을 나타냈고 도핑의 ‘도’자도 꺼내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고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인터뷰 당일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의무분과위원회에서 ‘재검 결과 금지약물을 복용했다는 단서를 찾을 수 없다’며 ‘가벼운 경고 조치로 이번 일을 마무리한다’는 발표가 나오면서 백은비는 비로소 웃음을 되찾았다.
▲ 동계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따고도 약물파문 때 문에 혹독한 시련을 겪은 백은비. 마치 지옥을 갔다온 것 같다고. 이종현 기자 | ||
의무분과위원회에서도 혐의 없음을 인정해 주었지만, 그래도 백은비가 받은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은 듯했다.
스피드스케이팅 3,000m에서 은메달을, 1,500m에서 동메달을 따 행복에 도취돼 있던 것도 잠시. 곧바로 도핑테스트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 선수단은 발칵 뒤집어졌다. 국내외 취재진은 백은비를 뒤쫓으며 ‘도핑 파문 미스터리’라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양산해 냈다.
“청문회를 마치고 기자회견을 하는데 기자들은 내가 약을 먹고도 발뺌한다고 보는 것 같았어요. 처음엔 단장님이 모든 걸 답변하시고 난 가만있기로 했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한마디 했어요. 내가 금지약물을 먹었다는 증거가 있냐고요. 만약 그 증거를 갖고 있는 분 있으면 나오라고 했죠. 분위기 진짜 험악했어요.”
백은비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스케이트를 잘 타서, 좋은 성적을 내서 유명해졌더라면 정말 행복했을 텐데 약물복용으로 유명인사가 된 건 서글픈 일”이라는 얘기였다.
백은비의 수상 이후 스포츠계 안팎에선 사격의 강초현을 잇는 여자 스타가 탄생했다며 스포트라이트를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인터넷 팬클럽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만큼 귀엽고 깜찍한 외모에다 실력까지 갖춘 미녀 스타의 등장은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앳된 외모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여린 여인. 겉모습만으로는 그녀가 대학 졸업 후 실업팀 선수로 뛰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백은비는 이야기를 나눌수록 이미지와는 달리 터프하고 솔직하며 털털한 성격을 드러냈다.
백은비의 유명세는 이번 아시안게임 중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대남에 대해 취재 경쟁이 벌어졌던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보통 ‘남친’이 있어도 없다고 잡아떼는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백은비는 너무 솔직담백했다.
“(‘남친’이) 이번에 대학에 들어갈 거예요. 전에 다닌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다며 다시 시험을 치렀거든요. 서로 양가 부모님께 인사도 드렸는데 결혼 여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헤어지지 않고 잘 만나다보면 결혼할 수도 있겠지만 4, 5년 뒤의 일을 지금 확정지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여자들이 좋아하는 ‘킹카’는 아니에요. 외모도 별로고. 그래도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날 웃길 줄 아는 남자라는 거죠.”
이번 약물 파문 때도 일본에서 남자친구와 나눈 전화 통화가 유일한 안식처였다고 한다.
구김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밝은 표정이지만 백은비한테는 말 못할 가정사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무남독녀 외동딸인데 실제로는 오빠와 언니들이 있는 것. “외동딸이라고 말할 때마다 오빠, 언니들한테 미안했어요. 정말 나한테 잘해주고 친하게 지내는데 떳떳하게 그 존재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항상 마음에 걸렸죠. 지금도 이런 얘기하는 게 잘하는 건지 판단이 잘 안서요. 하지만 오빠, 언니들은 아주 좋아할 거예요.” 배다른 남매들이고 같이 살지는 않지만 친남매 이상의 교감을 나누며 가족애를 이루고 있다는 설명이다.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이 쇼트트랙에 가려져 가슴이 아프다는 백은비는 인터뷰 말미에 “‘반짝 스타’가 아닌 롱런할 수 있는 진짜 스타가 되기 위해서라도 스케이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