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선홍은 현역 은퇴에 대해 “운동장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 확실히 선을 긋고 새 인생을 준 비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 ||
황선홍의 특징은 인터뷰 일정을 잡기가 힘들지 한번 약속을 하면 칼같이 지킨다는 사실. 특히 약속 시간 즈음에는 수시로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기자의 위치를 확인한다. “어디쯤 오셨어요? 위치는 정확히 알고 계시죠?”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서 전화를 하기 때문에 5분 늦는 것도 굉장히 미안해지는 상황이다.
축구선수로서뿐만 아니라 남자다운 매력과 감성적인 분위기가 철철 넘치는 ‘코치’ 황선홍과의 ‘취중토크’는 서울 올림픽공원 부근의 ‘이즈미’라는 일식집에서 이뤄졌다.
“은퇴하면 한가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바빴어요. 얼굴에 화장까지 하고 방송 출연도 했으니까요. 인터뷰 거절한 게 너무 많아 그분들께 죄송해요.”
미련이 남지 않는지, 서운하지 않는지를 물었다. 물론 현역 은퇴에 대한 얘기다. 처음엔 “힘든 운동 안하고, 스트레스 안받고, 홀가분해서 너무 좋다”는 가벼운 이야기를 흘렸다가 이내 속을 내비친다.
“선을 그은 거죠. 운동장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확실히 선을 긋고 다른 인생을 준비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겁니다. 힘든 재활훈련 끝에 다시 공을 찬다고 해서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어요. 없잖아요. 월드컵에 또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다’ ‘더 이상 욕심내지 말자’고 마음먹으니까 정리하기가 수월하더라고요.”
황선홍이 보는 ‘축구선수 황선홍’은 어떤 모습일까. 자신에 대해 평가를 해달라고 말하자마자 나온 말이 “난 실패했다”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반전’도 만만치 않다. 황선홍은 축구선수 황선홍이야말로 정말 좋은 선수라고 솔직한(?) 평가를 내렸다. 부상도 많았고 운도 좋지 않았고 노력도 부족했지만 다른 선수들이 갖지 못한 축구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만큼은 자랑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파란만장한 축구 인생 중에서 ‘죽어도 잊지 못할 장면’을 꼽아달라고 했다.
“94년 미국 월드컵 때 골키퍼와 일 대 일 상황에서 ‘똥볼’ 날렸을 때? 아니 그건 괜찮다고 생각해요. 축구 하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아마도 98년 프랑스월드컵을 눈앞에 두고 중국전에서 골키퍼와 부딪혀 부상당했을 때를 제일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그 상황만 피해갔더라면, 그동안 욕먹었던 부분들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을 거예요. 당시 내 몸 상태는 최고조에 다다라 있었거든요.”
황선홍의 술 실력은 축구계에서 입소문이 나 있다. 술을 잘 마시기도 하지만 아무리 마셔도 취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노래요? 잘 안해요. 못하니까 안하죠. 옛날엔 트로트도 곧잘 불렀는데 요즘엔 후배 앞에서 그런 노래 부르면 끼워주지도 않을 걸요. 18번은 있어요. 제목이 ‘다 줄 거야’던가? 아는 형이 이 노래를 부르는데 너무 멋있어서 따로 배워뒀다가 지난번 팬 미팅 때 이 노래를 불렀거든요. 그런데 ‘삑사리’가 나서 얼마나 창피하던지… 그 노래도 노래방 모니터 없으면 부를 수도 없어요.”
황선홍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는 아내 정지원씨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 후 지금까지 여자는 일방적으로 기다리는 입장이 되고 남자는 한없이 미안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선상에서 커다란 위기 없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부러워 보였다.
이야기를 듣다가 불쑥 물었다. ‘살면서 유혹을 받거나 잠시 다른 마음을 품은 적은 없었느냐’고. 이내 솔직 담백한 답변이 돌아온다.
“왜 없었겠어요. 조금 있었죠. 내가 ‘오리지널 에프엠식’으로 운동과 집만 알고 살았던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그런 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일이잖아요. 상식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요.”
황선홍이란 이름에 항상 따라다니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홍명보다. 나이는 한 살 차이지만 학번이 같아 친구로 지내는 사이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상반된 인생살이로 인해 약간의 라이벌 의식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실제로는 사심 없이 친한 친구지간이다.
“누가 더 잘 나가고, 누가 더 유명해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나나 명보 정도의 선수라면 앞으로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죠. 차이점이요? 명보가 똑똑하다면 난 바보스러운 거?”
말해놓고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씁쓸한 웃음을 흘리는 걸 보면.
빠질 수 없는 질문 한 가지. 재테크와 관련된 내용이다.
“대표팀 생활을 일찍부터 시작해서 그런지 어떤 사람은 내가 빌딩 짓고 사는 줄 알아요. 그렇게 많은 돈을 모으진 못했어요. 앞으로 또 벌 텐데요. 뭐.”
‘똥볼’이란 오명을 뒤집어쓴 뒤부터 인터넷을 보지 않았다는 가슴 아픈 사연,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가출했다가 이틀 만에 붙잡혀 돌아온 이야기, 유독 자신한테 사랑과 정을 쏟았던 히딩크 감독에 대한 추억담을 나누다 마지막에 코치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심경 고백에서 황선홍이란 남자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작하는 거예요. 당장 프로 2군팀을 맡았다고 해서 뭘 가르칠 수 있겠어요. 감독님과 다른 코치분들께 배우면서 하는 거죠. 하지만 선수들에게 이런 건 확실히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축구를 사랑하는 방법이요. 어? 술이 떨어져 가네. 이번엔 원샷입니다. 자, 원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