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년 동안의 J리그 생활을 끝내고 복귀한 노정윤 은 선수로서의 마지막 열정을 K리그에 바치겠다 고 다짐한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J리그 원년 멤버로 시작한 9년간의 일본 생활. 지난해 노정윤은 ‘선수로서의 마지막 투혼을 K리그에 쏟고 싶다’는 염원에 그 질긴 인연을 털고 돌아와 부산이라는 낯선 곳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요즘 그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영화 제목처럼 안팎으로 안정된 생활 속에서 ‘고국살이’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외국 생활을 오래한 데서 비롯된 듯한 불타는 애국심, 살뜰한 선후배 챙기기, 한국축구의 미래에 대한 걱정 등 노정윤은 다양한 주제들로 ‘해설가’다운 입담을 과시했다.
노정윤한테는 가깝게 지내는 ‘멤버’들이 있다. 물론 대부분이 축구선수들로 어렸을 때부터 대표팀에서 한솥밥 먹으며 동고동락했던 선후배들이 주축이다. 홍명보, 황선홍, 하석주, 강철, 유상철 등이 그들. 지난 16일 한일전이 끝난 뒤에도 하석주와 멤버들은 각각의 모임을 끝내고 새벽녘에 뭉쳤다. 하석주의 대표팀 은퇴식을 화두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다 결국엔 음주가무가 섞인 ‘그들만의 룰’대로 뒤풀이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술은 (하)석주형이 제일 잘 마셔요. 주량이요? 석주형이 취하질 않아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말 모르겠어요. 술자리에선 카리스마 하면 (홍)명보형이 아니라 석주형이에요. 그 형 앞에선 술을 안 마실래야 안 마실 수가 없죠. 하지만 노래는 정말 못해요. 음정, 박자 무시하는 건 정말 수준급이라니까.”
▲ 왼쪽부터 하석주, 홍명보, 황선홍 | ||
“집안 대대로 술 먹는 사람이 없었어요. 내가 ‘돌연변이’인 셈이죠. 하지만 12시를 넘기지 못해요. 그 시간만 되면 잠이 쏟아지는 바람에 그냥 옆에서 고꾸라지는데 새벽 4시나 5시 정도 되면 선배들이 깨워요. 포장마차 가자고.”
술 이야기가 계속됐다. 특히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선수들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끊임없이 쏟아지니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었다. 노정윤이 본 홍명보는 웬만해선 술을 잘 안 마시는 대신에 한번 마시면 ‘똑 부러지게’ 마시는 스타일이다. 차수를 거듭하다가 포장마차 가서 해장술과 국수로 속을 푼 뒤에야 끝이 나는 편.
홍명보는 술자리에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 걸로 유명하지만 가라오케에 가선 분위기가 달라진단다. 다른 사람이 노래를 부르면 마치 ‘태클’을 걸 듯 마이크를 뺏어 들고 가수 뺨치는 노래 실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흥이 나면 황선홍과 함께 개다리춤을 추는데 입소문이 난 뒤엔 상당히 자제하는 편이라고.
반면 황선홍은 빈틈 투성이(?)란다. 룸살롱 ‘마담 언니’들한테 최고의 인기를 얻을 만큼 ‘대인 관계’의 귀재라고. 정이 많고 인간성 좋은 게 장점이자 단점. 대신 ‘멤버’들 중 가장 원대한 야망을 갖고 있다고 한다. 노정윤은 세레소 오사카 시절 황선홍과 함께 보냈던 1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자연인’ 황선홍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었고 ‘축구선수’ 황선홍을 가깝게 느낄 수 있어 너무 좋았다고 말한다.
노정윤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축구를 하기엔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부모의 뒷바라지는 눈물겹도록 헌신적이었다. 택시운수회사 옆에 작은 구멍가게를 내 담배를 팔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축구화와 운동복 등을 사줬고 학교에 낼 돈이 없을 때는 직접 선수들 식사를 챙기고 청소를 도맡는 등 몸으로 ‘때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정윤의 아버지는 키가 아주 작은 편이다. 대표팀 경기가 끝나고 라커룸 부근에서 아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도 기자들이 있으면 조용히 사라지곤 했었다. 키가 작고 볼품없어 보이는 당신의 존재로 인해 아들의 이미지가 안 좋아질 것을 우려한 행동이었다. 노정윤은 아버지의 깊은 배려를 눈치챈 뒤론 아버지가 나타나기만 하면 어깨동무를 해서 아버지가 ‘도망’가지 못하게 했단다. 노정윤에게 아버지만큼 소중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었다.
분위기가 엄숙해지자 예전 ‘취중토크’의 주인공들을 ‘안주’ 삼아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축구인들로 구성된 ‘열하나회’ 멤버 중 한 명인 이운재가 보기보다 술을 잘 마신다고 말하자 노정윤이 대뜸 이운재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경희대 앞 주점에서 청하 57병 마신 일’을 놓고 ‘확인 사살’을 날린다. 취중 상대였던 기자를 2차에서 폭탄주로 보내 버린 신태용한테도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 당시의 상황에 대해 ‘정황 취재’를 벌이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고정운, 황선홍 등한테도 계속 연락을 취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자 또다시 두 사람과 관련된 취중 에피소드들이 계속 튀어나왔다.
소주 반 병이 3병으로 늘어나면서 한국 축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노정윤의 솔직한 생각들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지금 어린 선수들이 누리는 인기는 ‘거품’이나 마찬가지예요. 이건 나뿐만 아니라 우리 ‘멤버’들 생각이 모두 그래요. 축구선수가 연예인화돼서는 절대로 성공 못해요. 이건 정말 장담할 수 있어요. 축구선수는 축구선수로 성공해야죠. 이쁜 여자 연예인들과 노닥거리며 시간 낭비한 후엔 뭐가 남겠어요. 놀 거 다 놀고 해볼 거 다 해보고선 축구로 성공 못해요. 몇몇 후배들 보면 정말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왜 우리들을 통해 교훈을 삼지 못하는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는 건 벨기에에서 활동하는 설기현과 현재 수술 후 재활훈련을 하느라 고생중이지만 기대를 품게 하는 박지성 같은 ‘땀맛 아는’ 후배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축구를 안했으면 산부인과 의사가 됐을 것 같다고 말하는 노정윤. 하지만 소속팀 부산의 K리그 우승과 선수들의 건강한 플레이를 기원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다시 태어나도 영락없는 축구선수다.
노정윤은 지난해 일본을 떠나오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단다. 3백여 명의 일본 팬들이 공항까지 배웅 나와 눈물을 흩뿌렸던 모습이 강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 9년이란 녹록치 않은 세월과 열성 팬들의 성원을 뒤로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그가 진정 은퇴 전에 이루고 싶은 소원은 무엇일까. 질문을 막 하려던 순간, 노정윤이 던진 한마디에 바로 상황이 ‘정리’돼버렸다.
“오늘 꼭 서울 올라가셔야 해요? (신)태용이형이 정말 술 잘하신다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