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봉철은 매니지먼트 일과 더불어 대학시절 ‘전 공’을 살려 사진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우태윤 기자 | ||
지난 99년 소리 소문 없이 은퇴를 한 뒤 일본으로 유학 가는 바람에 소식이 뚝 끊겼던 그가 최근 연예인 매니저로 변신, 선수 때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대형 연예 매니지먼트사에 입사, 엔터테인먼트의 세계를 간접 체험하다 올 초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SW밸리 엔터테인먼트를 세워 본격적으로 연예인 매니지먼트 일에 뛰어든 것.
동봉철은 엔터테인먼트 일을 하면서 서울 신사동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광고 촬영이나 배우들 프로필 사진 등을 찍으며 사진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 21일 동봉철을 만난 곳도 그의 스튜디오였다(동봉철은 체육특기생으로 중앙대 사진학과를 나왔다).
선수시절보다 훨씬 육중해진 체구가 눈에 띄어 몸무게를 물어보니 “세 자리 숫자에 조금 못미친다”며 밝히길 꺼려했다. 운동할 당시에도 매스컴과의 인터뷰를 질색했던 탓에 은퇴 후 <일요신문>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는 그는 야구선수라는 타이틀을 벗고 이제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연예 엔터테인먼트에서 ‘만루 홈런’을 칠 그날을 위해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몸이 안 좋았다. 동료들이 ‘종합병원’이라고 놀릴 만큼 온몸이 부상이었다. 그런 상태로 야구를 계속했다가는 정말 (야구가) 싫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선수협의회가 출범하기 직전인 99년 겨울에 은퇴했다.”
통풍성 관절염, 척추염, 고관절 부상 등 안 아픈 곳이 없었다고 한다. 은퇴 후에도 2년간은 부상 후유증으로 시달렸다. 좀 심하게 걷거나 뛰면 어김없이 몸에 이상이 나타났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는 2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어학 공부에만 매달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무조건 쉬고 싶었다. 마땅히 할 일도 없었고. 그래서 일어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 갔는데 준비한 돈이 많지 않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라면가게 종업원, 비디오 배달, 전단지 돌리기 등 10여 가지가 넘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도 수월하지 않았다.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책만 잡으면 좀이 쑤시곤 했다. 한 6개월 정도 어학 공부에 매달리다 그후론 ‘마음을 비웠다’고 한다.
▲ 94년 삼성시절의 ‘날렵했던’ 모습. | ||
물론 이 일 또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매니지먼트’ 하면 단순히 연예인을 쫓아다니며 뒷바라지해주는 걸로만 알고 있었는데 연예인을 스타로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과 수익을 창출하려는 갖가지 아이템들을 구상하는 것도 초보 매니저한테는 버겁기만 할 따름이었다. 탤런트 정흥채, 이아현, 그리고 ‘강호동의 천생연분’에 출연하며 주가를 높이고 있는 신인 이영은 등이 현재 동봉철의 ‘관리 대상’이다.
“하루는 ‘장미의 전쟁’을 진행하는 강병규와 우연히 방송국에서 만났다. 정말 기분이 묘했다. 예전 야구장에서 만나면 “형, 내 공 좀 그만 쳐”라며 봐달라고 했던 후배인데 지금은 내가 “야, 우리 애들 좀 잘 봐주라”며 부탁하는 처지가 됐다. 둘 다 야구선수 출신이지만 병규는 이미 자리잡은 상태고 난 신인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방송국서 본 병규의 당당함이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야구장이 아닌 방송국에서 만난 후배에게 소속 연기자를 ‘잘 봐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을 해야 했던 동봉철은 잠시 씁쓸한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금세 상황을 ‘정리’했다고 한다. 그 상대가 강병규가 아니었다고 해도 자신의 처지에선 연기자들을 위해 사람을 만나 부탁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쪽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끔 후배들이 전화를 한다. ‘연예인 좀 만나게 해달라’고. 연예인을 흥미 위주로만 보는 시각을 바꾸고 싶다. 야구선수로 큰 성공을 이루진 못했지만 진실하고 유능한 매니저로 동봉철이란 이름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동봉철이었다. 어렵게 인터뷰 자리에 나온 만큼 기사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잘 좀 써 달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쑥스러움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