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라는 단어에 같이 운동을 하거나 사회에서 만난 친구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별안간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와 함께 나타났다.
그렇지 않아도 여자 친구가 있다는 소문에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기자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기 위한 그의 서비스 정신(?)에 약간의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난 5월 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47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자 단식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파란과 이변을 일으켰던 주세혁(24·상무). 전문수비선수로서 53년 만에 처음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전에 오른 데다 우리나라 남자 탁구 역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 ‘2강’에 드는 등 그가 일궈낸 업적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그의 세계 랭킹도 61위에서 22위로 껑충 뛰었다.
주세혁은 부대에서 ‘선물’로 안겨준 포상휴가의 마지막날을 ‘취중토크’와 함께하며 여자친구와의 새콤달콤한 러브스토리를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는 14일 전국종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벌써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번 성적이 ‘운이 좋아서’가 아닌, 진짜 실력으로 이뤄낸 결과라는 사실을 새로운 대회에서 입증해 보여야 하기 때문.
지난 2일 서울 강남의 ‘물 좋은’ 나이트클럽 앞에 있는 고깃집에서 이뤄진 주세혁,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와의 ‘취중토크’는 위치 때문인지 나이트클럽에 대한 ‘추억담’으로 이야기가 시작됐다.
“2년 전만 해도 이곳(고깃집 앞의 B나이트클럽)에 자주 다녔어요. 지금은 1년에 서너 번 정도 올까? 이태원이나 다른 곳도 다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B의 ‘물’이 제일 좋았어요. 요즘엔 많이 흐려졌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다시 이태원을 찾는 중이에요.”
생김새는 영락없는 ‘샌님’인데 노는 문화는 외모와 전혀 딴판이다. 비록 친구들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부티 나는’ 젊은이들의 ‘특구’ 정도로 비쳐지는 유명 나이트클럽을 즐겨 찾고 ‘수질’을 논하는 등 주세혁은 초장부터 기자의 선입견을 서서히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 로이터 | ||
“저도 그 ‘나이트’에 자주 갔어요. 부킹도 했었죠. 그때 왜 세혁씨를 못 만났는지 모르겠어요.”
김씨의 가벼운 회상에 주세혁은 “언제 갔었느냐”며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두 사람은 2년 전 문정동의 한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친구들과 함께 온 김씨를 보고 첫눈에 반한 주세혁이 ‘대시’한 것이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한테 사귀어보자고 얘기해 봤어요. 그만큼 선화가 마음에 들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예요.”
이어진 김씨의 설명. “숫기도 매력도 없을 것 같지만 은근한 남성미가 있어요. 성격도 소탈하면서 자상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끌린 건 만난 지 3개월 동안 손을 잡지 않았다는 거예요. 인라인스케이트장에 놀러 갔다가 제가 넘어지자 손을 잡아 준 것이 처음이었어요. 남자에 대한 믿음이 생겼죠.”
주세혁은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무명 선수나 다름없었다. 김택수(KT&G), 오상은(상무), 유승민(삼성카드), 이철승(삼성카드)에 이어 ‘넘버5’ 자리를 오락가락했고 대표팀에 선발돼서도 남자 훈련 파트너가 없어(주세혁은 ‘넘버5’의 운명이라고 표현했다) 여자 선수들과 연습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저만 여자 선수들과 훈련했던 건 아니에요. 김택수, 오상은 선배 모두 저와 같은 단계를 거쳐 올라갔어요. 여자 선수랑 하다보면 스피드와 변칙적인 방법을 배울 수는 있지만 파워와 기교면에선 남자보다 뒤떨어지기 때문에 어려울 때도 있죠. 다행이라면 여자 선수들과 훈련했던 제가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에 (여자 파트너를 주로 상대하는) 후배들이 자신감이나 자부심을 가졌을 것 같아요.”
잘 알려졌다시피 주세혁은 수비전문선수다. 탁구계엔 ‘수비전형 선수는 절대로 우승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인지 국내에서 수비전형 선수로는 주세혁이 유일하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잘 통한다. 국내 선수들은 공의 스피드가 워낙 빨라 이기기가 힘들지만 외국 선수들은 공이 센 반면 타이밍이 느리고 정석대로 탁구를 치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훨씬 쉽다고 한다.
▲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부대에 다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한다고 말하면서도 주세혁은 ‘소리 없이’ 주량을 과시했다. 인터뷰하느라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하는 남자친구를 위해 김선화씨는 고기를 얹은 상추쌈을 만들어 손에 쥐어주곤 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예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왜 탁구를 택했냐구요? 솔직히 공부하기 싫어서 시작한 거였어요. 처음엔 조금하다 그만 둘 줄 알았죠. 그런데 탁구를 하면서 저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됐어요. 은근과 끈기였어요.”
주세혁은 태릉선수촌에서 훈련 참가율이 98%로 최고의 성적을 자랑한다. 특히 새벽운동과 불암산 등반은 대표팀 선수들의 최대 난코스인데 주세혁은 단 한번도 빠진 적이 없다고 한다. 가끔 몸이 아파서 오전, 오후 훈련을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탁구장에 나가 있어야 숨쉬기가 편할 정도로 근면·성실의 표본이다.
주세혁과 김선화씨, 2년 후에 결혼할 예정인 두 사람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새삼 세대 차이라는 걸 절감할 수 있었다. 좀 야한 포즈를 요구해도 좀처럼 ‘마다하지 않는’ 신세대 커플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