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영. 그에게도 태극마크는 녹록지 않았다. | ||
대표팀 왕고참 수비수 ‘아파치’ 김태영(전남). 92년 동아대 재학 시절 국가대표에 선발돼 11년간 태극 마크를 달며 탄탄한 입지를 구축해온 그도 축구에 염증을 느낀 적이 있었다. 94년 미국월드컵 최종 엔트리 탈락이 바로 그것. 김태영은 그 일만 회상하면 갑자기 목소리 톤을 높인다.
“93년 미국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과 그 해 대통령배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였기 때문에 미국행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일이 꼬였다. 신생팀 완산 푸마를 거부하고 국민은행에 입단한 나를 두고 일부 축구인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
‘대표팀에서 유일한 실업 선수인 김태영은 프로 선수들처럼 꾸준한 몸 관리가 불가능하다’며 대표 선발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결국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고 그 이후 축구에 대한 회의가 들면서 선수 생활을 그만두려 했다.”
▲ 에인트호벤의 ‘꾀돌이’ 이영표는 대학 졸업반 때 까지 대표팀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 ||
2000년 시드니올림픽 예선부터 혜성처럼 등장해 네덜란드 에인트호벤 주전 풀백으로까지 성장한 스타 ‘꾀돌이’ 이영표.
월드컵 4강 주역이긴 하지만 99년까지 그는 철저한 무명이었다. 대학 졸업반 때까지도 대표팀과 인연을 맺지 못했던 것.
“지독하게 운이 안 따랐다. 고교 때도 우승을 두 번씩이나 했고 95년 춘계대회에서는 MVP까지 탔는데 대표팀 소집 때만 되면 항상 부상을 당해 뽑히지 못했다. 억울하다는 생각에 혼자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오기로 매일 밤마다 야간훈련을 나가 개인연습을 했다.”
이영표와는 다르게 고교 시절부터 재목감으로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은 ‘설바우두’ 설기현은 각급 대표로 꾸준히 선발되고도 부상 등 운이 따르지 않았던 케이스.
98아시아청소년(U-19)선수권대회, 99나이지리아 세계 청소년(U-20)대회 대표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예선 대표 등 엘리트 코스만을 밟았으나 정작 본선 무대만 가면 ‘고개 숙인 남자’로 돌변했다고 한다.
▲ 설기현 | ||
울산의 ‘꽃미남’ 김도균은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는 것으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시드니올림픽 대표팀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내 포지션에는 고종수, 김남일, 이관우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허정무)감독님은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기가 생겼다. 매일 새벽 감독님 숙소 앞에서 보란듯이 줄넘기를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감독님이 나에게 주장을 맡기고 주전으로 뛰게 했다.”
포항의 3년차 수비수 강용은 국가대표 이야기만 나오면 이를 간다. 4월16일 한·일전을 앞두고 임시 소집명단에 뽑혀 4월7일 파주트레이닝센터로 향했으나 ‘쓴맛’만 봐야 했던 것.
당시 일부 구단의 선수 소집 반발로 훈련이 무산돼 그날로 다시 비행기를 타고 포항으로 돌아와야 했다. 결국 쿠엘류 감독 앞에서 실력 발휘 한번 제대로 못하고 최종 명단에서 탈락했다.
어찌 보면 태극마크는 선수들의 한과 눈물로 이뤄진 훈장이기도 한 셈이다.
유재영 월간축구 베스트일레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