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은 정직하다’고 했던가. 하지만 ‘공차는 사람 도 정직하다’는 말을 떠올릴 만큼 이명화는 솔직담 백했다. 이종현 기자 | ||
여자축구대표팀의 최고참이자 축구대표 1기생인 이명화(30·INI스틸)는 자리에 앉자마자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룬 뒤 금의환향했던 당시의 인천공항 모습을 떠올리며 기자의 ‘출석 여부’를 확인했다.
1990년 최초의 여자 대표팀에 이름을 올린 뒤 부상 당했을 때를 제외하곤 지난 13년 동안 줄곧 태극 여전사로서 이름을 날린 그는 은퇴 직전 맛본 ‘꿈 같은 일’로 인해 귀국 이후에도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젠 은퇴를 한다고 해도 후배들한테 떳떳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최고참 선수이고 팀 전력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존재 자체만으로 후배들한테 힘이 됐을 거라는 위안이 그의 어깨 위에 놓인 책임감을 덜게 해주는지도 모른다.
술 한번 진하게 마시자는 인사성 발언을 해놓고도 막상 술자리 앞에서 몸 관리를 걱정할 정도로 축구에 푹 빠진 그와의 ‘취중토크’는 대표팀 귀국 다음날인 지난달 24일 서울 강북의 한 간이주점에서 이뤄졌다.
“어제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남이란 곳을 가봤어요. 강남에서도 그 유명한 청담동 있잖아요. 선배가 저녁 사주겠다고 해서 그곳으로 향했는데, 야, 정말 ‘물’ 좋대. 세상에 이쁜 여자들은 그곳에 다 모였나봐요. 기죽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그래서 그 선배한테 다음부턴 이런 데 데려오지 말라고 했죠, 차라리 포장마차가 훨씬 더 편하다면서요.”
서른 넘은 여자가, 시골도 아닌 인천에 살면서 강남에 처음 가봤다는 이야기가 쉽게 믿어지질 않았다. 기자 앞에서 마치 시골에서 처음으로 서울 구경 온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강남 체험담을 신나게 털어놓는 이명화의 얼굴이 신선함으로 가득했다.
“어떻게 해서든 오래 남아야겠다(결승까지 오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직감이랄까, 뭔가 될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요. 사스 여파로 대회가 4월에서 6월로 연기된 것도 좋았어요. 두 달 동안 조직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었으니까요. 아 참, 협회에서 조리사를 보내주신 덕분에 맛난 음식을 먹었던 것도 큰 힘이 됐어요. 한 호텔에 묵었던 북한 선수들한테 김치와 국을 건네주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 술 이름이 뭐예요? 꽤 맛있네.”
섹시한 여가수의 CF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술을 마시던 이명화는 ‘여전사’답게 원샷으로 연신 술잔을 비우곤 했다.
축구를 시작한 이래 줄곧 숙소 생활을 해왔다는 그한테 단체 생활의 단조로움, 지루함, 답답함이 없는지를 물었다.
“감독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나이 서른 넘으면 내보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젠 혼자만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출퇴근하며 운동해도 얼마든지 몸 관리를 잘 할 자신이 있으니까요. 남자도 만나고 그래야 하는데 10시가 통금 시간이라 데이트는 꿈도 못꿔요.”
‘데이트할 상대가 있나 보다’라는 기자의 유도 질문에 이명화는 너무나도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만나자는 남자는 있어요. 하지만 접근해오는 의도가 ‘수상’해요. 사실 언니(기자를 지칭함)도 보시다시피 제 얼굴을 보면 누가 선뜻 좋아하겠어요. 아마도 제가 실업팀에 오래 있었고 돈도 많이 모았을 것 같고, 그래서 사귀자고 그러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명화가 이성으로 남자를 사귀어본 경험은 10년 전 한 동네에 살던 남자친구 한 명뿐이라고 한다. 실연의 상처를 곱씹으며 헤어졌지만 그 이후론 다른 남자한테서 이성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
“남자들은 이상해요. 조금 친해지면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전 그런 행동이 전혀 와 닿지가 않는 거예요. 느낌이 없는 거죠. 가끔은 이래서 시집갈 수는 있겠나 싶을 때도 있어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펜싱선수로 활약했던 이명화는 고1 때 최초의 여자축구선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강릉 강일여고에서 축구부 생활을 했다.
“당시 ‘갈기머리’를 하고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김주성 아저씨가 이상형이었어요. 너무나 멋있게 보여 축구선수를 동경하게 됐죠. 하지만 당시엔 국내에 여자축구부가 없었어요. 그냥 마을 논밭에서 남자들과 공 차는 걸로 만족해야 했죠. 그래도 언젠가는 여자 축구부가 생길 거라고 확신했고 나름대로 축구 관련 책을 사서 이것저것 연구하고 실습해보며 연습을 했어요.”
이명화의 선견지명대로 여자축구부가 창단되었고 선수가 되기 위해 전학을 불사하는 등 적극적으로 애를 쓴 이명화의 꿈은 마침내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말그대로 논밭에서 공 차는 수준이었지만 교과서를 보며 착실히 연습한 덕분에 축구 유니폼을 입은 이명화는 물 만난 고기처럼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녔다. 결국 고2 때 대표팀에 뽑히더니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월드컵 이후 주변에서 안정환 선수한테 사인 좀 받아달라는 부탁을 엄청 많이 받았어요. 파주에서 훈련하다보면 가끔씩 마주칠 때가 있으니까 그들 입장에선 제가 부러울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같은 대표팀 선수인데 아무리 그 선수가 볼을 잘 차고 잘 생겼다고 해도 사인을 받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몇몇 선수들은 정말 사인을 받더라니까요. 자존심 상해 죽는 줄 알았어요.”
우연히 파주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으러 온 황선홍 전남 2군 코치와 마주칠 기회가 있었단다. 황선홍이 이명화를 보자마자 던진 첫 마디가 “아직도 하세요? 이젠 그만해요”라고 말하더라고.
“그래서 ‘아저씨처럼 공 찰 때까지 할 건데요’라고 말했어요. 월드컵 본선 1승은 올려놓고 그만둬도 그만둬야겠죠?”
지난해 월드컵에서 한국 남자 대표팀이 4강에 올랐을 때 기쁨 반, 배아픔 반(여자대표팀이 먼저 그런 업적을 이뤄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란다)이었다는 솔직한 고백까지 털어놓는 이명화를 보니 그의 축구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대표팀 은퇴 경기를 꼭 치르고 싶어요. 협회에서도 약속해 주셨고요. 지금까지 그렇게 은퇴한 선수가 없었거든요. 그 다음엔요? 연수차 외국으로 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