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축구심판이자 국제심판 인 임은주씨. 지난 3월26일 K리그 성남 일화와 대구 FC의 경기에서 옐로카드를 들어보이고 있 다. | ||
최근 남성들의 독점무대로 인식됐던 이른바 ‘터프 종목’ 심판들의 세계에 여성들의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 유일, 또는 국내 제1호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러웠을 정도로 여자심판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
하지만 이제 축구를 비롯해 유도, 아이스하키 등 다분히 격한 스포츠에서도 날카로운 눈빛과 냉정한 판단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여자 심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남성들이 평정하던 종목에 상륙한 만큼 이들 여자 심판들의 세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한국 여성 최초의 축구 국제심판, 세계 최초의 프로리그 여성 전임심판, 여자 월드컵대회 아시아 최초의 여자주심, 여성 최초의 올림픽 주심 배정 등 국내 제1호 여자축구심판이자 국제심판인 임은주씨(37)를 수식하는 표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제는 스타 플레이어도 쉽게 항의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임은주 심판이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심판이 되고서 세 번 이상 울게 되면 그만두겠다고 결심했죠. 그럼 지금까지 몇 번이나 울었냐구요? 아마 수십 번은 더 되는 것 같은데요.(웃음)”
처음엔 여자 심판이 경기를 배정 받게 되면 혹독한 신고식(?)을 각오해야 했다. 여기서 신고식이란 신참내기 여자 심판을 길들이고 기선을 제압하려는 선수들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
임은주 심판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프로 심판으로 데뷔한 그 해에 ‘최다 선수 퇴장’기록을 세웠을까. 당시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안정환 선수에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레드카드를 내보였던 그의 당찬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팬들이 많을 것이다.
이제 축구계에는 이런 임은주 심판을 뒤따라 세 명의 여자 국제심판이 새롭게 배출됐다. 신화연(36) 홍은아(23) 한경화씨(25)가 그 주인공들.
홍은아씨(이대 대학원 경영학과)는 “축구심판은 끊임없이 달릴 준비가 돼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면서 “축구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듯 수월한 경기는 하나도 없다”며 권한 뒤에 따르는 막중한 책임감을 강조했다. 초등학교 시합이나 실업팀 또는 프로팀의 시합이나 심판으로서 느끼는 무게는 모두 똑같다는 것.
▲ 조민선씨(왼쪽), 이경선씨 | ||
한경화씨(은평구청 여성축구교실 감독)는 “소신 판정 뒤에 따르는 항의에 대해서는 구두 주의, 그래도 불만을 표출할 때에는 옐로 카드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면서도 “경기가 끝나고 나면 선수의 입장에서 왜 항의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혹시 실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말했다.
이들 여자심판들이 여자축구 경기에 자주 투입되다 보니 남자 경기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호칭들이 오가기도 한다. 대학팀과 실업팀 선수들과 모두 선후배 사이라 급박한 상황에서 후배들은 심판을 “언니” “선배”로, 선배들은 “야, ○○야∼”라고 불러 순간 당황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축구만큼이나 격한 스포츠인 아이스하키에서도 이제 여자심판을 볼 수 있다. 올해 대한아이스하키협회는 사상 처음으로 여자 심판 2명을 선발했다. 남녀 포함 40여 명이 지원한 가운데 치러진 엄격한 테스트에서 최종 합격의 영예를 안은 두 여자 심판은 이경선씨(28)와 이태리씨(24).
두 심판 모두 빙상과는 ‘화려한’ 인연을 맺고 있다. 이경선씨(고려대 강사)는 2년 전 여자아이스하키대표팀에 발탁되어 올해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에선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다. 또한 고려대에서 스피드 스케이팅을 가르치면서 인라인스케이트(88∼97년 선수 생활) 심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피겨 스케이팅 심판으로 활약하고 있는 이태리씨(피겨 스케이팅 강사)는 지난해까지 연세대에서 직접 선수 생활을 했었고 지금은 자원봉사활동을 하며 장애인들을 지도하고 있다.
‘실전’ 투입을 앞두고 이들은 현재 몸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2∼3분마다 교체되는 선수들과는 달리 한 게임 전체를 모두 소화해야 하다 보니 체력 소모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한편 유도에서는 애틀란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조민선씨(한국체대 스포츠교육학 박사과정)가 도복이 아닌 정장 차림으로 판정을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올림픽금메달리스트라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조씨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목소리와 제스처.
조씨는 “판정에 따라서 째려보거나 구시렁거리며 불만을 내뱉는 선수와 눈이 마주칠 때면 포인트에 따라 선수의 사활이 결정되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며 냉정한 현실 뒤에서 느끼는 심판의 고뇌를 털어놓기도 했다.
김남용 스포츠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