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산 최경환의 헬멧. ‘always hustle!’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 ||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건 동료 선수가 부상당했을 때 빠른 회복을 위해 그 선수의 배번을 새겨놓는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배번을 ‘부적’처럼(?) 새겨놓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선수들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엄숙한’ 좌우명이나 생활신조 같은 단어나 문구를 적어놓고 틈 날 때마다 바라보기도 한다. 앞으로 경기장에서나 TV중계 때 눈을 크게 뜨고 잘 지켜보자. 선수들의 마음까지 보일지 모를 일이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롯데 선수들의 헬멧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숫자는 아마도 ‘20’이었을 것이다. ‘20’은 그라운드에서 쓰러진 임수혁의 배번.
동료들은 이 숫자를 야구 장비에 적어놓고 뛰고 달리면서 임수혁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는 소리 없는 메시지를 보냈다. 또한 프로야구선수협의회는 지난 3월 천안초등학교 화재사고로 숨진 어린 축구선수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숫자 ‘9’(당시 희생자 수)를 헬멧에 적어 넣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선수들이 헬멧이나 글러브 등에 적는 숫자는 부상 당한 동료 선수의 배번인 경우가 많다. 지금 함께 뛰지 못하는 아쉬움을 그 선수의 배번을 보면서 위로하는 셈.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자신의 배번을 적어놓는다. 배번은 이름과 함께 정체성을 규정짓는 ‘또다른 자신’이기에 선수들이 번호에 갖는 애착은 남다르다.
▲ LG 이상훈은 스파이크에 투·포수간 거리인 ‘18.44’ (m)를 새겨놓았다. | ||
그 동안 부상과 슬럼프로 부진을 면치 못했던 주형광(롯데)의 글러브에는 ‘復活’(부활)이라는 한자가 쓰여져 있다. 유독 재활 기간이 길었던 주형광의 ‘부활 글러브’에 대한 애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고.
역시 같은 투수인 이혜천(두산)의 모자 속에는 ‘집중’이라는 두 글자가 예사롭지 않게 적혀 있다. 올 시즌 제구력 난조에 빠져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투수’라는 놀림까지 받았던 이혜천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는 집중력이 필요했던 셈.
‘야구 천재’ 이종범(기아)의 모자에선 ‘忍’(참을 인)자가 눈에 띈다. 일본에서 돌아와 국내 무대에 복귀하면서부터 적어 놓은 것이다. ‘빈볼을 하도 많이 맞아 그렇게 적은 것’이라는 우스개도 있지만 이종범 자신은 진지하기만 하다.
“야구는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다. 참아가면서 천천히 하나하나 이룩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야구는 견디는 운동”이라는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한다.
홍성흔(두산)은 챙길 장비도 많은 포수라 그런지 문구도 가장 길다. 큼직한 프로텍터에 아예 ‘겸손하게 살자’고 여유 있게 글을 풀어놨다. 홍성흔은 “잘 나간다고, 인기 있다고, 성적 좋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도로아미타불’이 되더라”면서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고 경기에 임하겠다는 의미라고 설명.
▲ 두산의 일본인 투수 이리키의 모자챙에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노력하지 않는 천재보다 낫다’는 경구가 일본말로 적혀 있다. | ||
이외에도 장비를 통해 개인적인 추억이나 기억을 되새기는 선수도 있는데, 최경환(두산)이 대표적이다.
최경환은 지난 96년 대학 졸업 후 미국 프로야구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해 화제를 모은 유망주였다. 그러나 3년간 싱글A만 전전하다 귀국후 LG에서도 방출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이제 조금씩 그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최경환의 모자와 글러브에는 힘들 때 언제나 정신적 도움을 줬던 선친이 돌아가신 날짜가 적혀 있고 모자에는 ‘always hustle ♡51’을 새겨 의욕을 불태우는 중이다.
모자나 헬멧이 아닌 스파이크(신발)도 선수들이 각오를 다지는 데 예외일 수는 없다. 이상훈(LG)은 특이하게 ‘18.44’라는 숫자를 적어놓았다. 얼핏 암호처럼 보이는 이 숫자는 투수와 포수 간의 거리를 나타낸 것.
이상훈은 “앞으로도 이 거리에서 승부를 걸어야 하다 보니 숫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면서 “힘닿는 동안 공을 던지겠다”는 의미로 이해해달라고 했다.
국내 유일의 일본인 투수 이리키(두산)는 모자 안쪽에다 ‘氣合に勝る天才無し(집중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노력하지 않는 천재보다 낫다)’라는 문구로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있다. 이것은 2001 일본프로야구 야쿠르트 우승 당시 팀의 선발 투수로 활약할 때부터 사용해 왔던 것이라고.
김남용 스포츠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