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일찍이 1600년대부터 유럽 역사에 바둑 얘기가 나오고 있고 180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독일에서 바둑 책이 출판된 기록이 있으니, 다른 것은 제쳐두고라도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두고 있는 ‘일본식 현대 바둑’에서는 유럽이 오히려 우리보다 앞선 의미도 있는 것.
유럽 바둑대회는 물론 아마추어 대회지만 우리 식의 아마추어 대회와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우리 바둑대회는 프로든 아마든 가릴 것 없이 무조건 최강자를 가리는 것이고, 우승자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지만 유럽 대회는 축제 혹은 잔치다.
아마 6단 이상들이 겨루는 최강부가 있고 최강부 우승자가 유럽 챔피언이 되는 것은 비슷하나 그것말고도 다양한 형식의 대회가 동시에 진행된다. 아주 초보자에 불과한 두 자리 급수의 출전자도 많으며 그들은 그들끼리 즐겁고 진지하게 바둑을 둔다. 그런가하면 속기대회가 있고 9줄 바둑, 13줄 바둑 대회가 있으며 남녀 혼성 페어대회도 있다.
잔치는 2주일 동안 벌어진다. 출전자들 모두가 대회 마지막날까지 바둑을 둔다. 한 번 지면 탈락하는 토너먼트가 아니다. 1천 명 가까운 숫자가 출전했다 하더라도 막판에 가면 열댓 명 정도, 시상식 무렵에는 입상자 두어 명만 남아 썰렁해지는 그런 풍경이 없다.
아마추어 대회지만 하루에 한 판을 둔다. 제한시간은 각자 2시간30분. 웃음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프로 세계대회 제한시간이 각자 3시간인데 ‘아마추어 하수(?)’들이 무슨 2시간반씩이나…^^ 16급 이름표를 단 꼬마, 아주머니…그런 하수들이 20∼30분씩 장고를 하며 한 수를 두고, 그것을 다시 기보에 적는 모습이란!
참가자들은 주최측이 마련한 ‘바둑 카페’에서 사람들과 사귀고, 관광을 한다. 그래서 혼자 출전하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은 가족 친구들과 함께 와서 여름 휴가 2주일을 바둑에 바치고 돌아간다.
대회 중간 중간에 축구 대회도 있다. 바둑 잔치의 여흥답게 축구 대회도 치수제를 적용한다. 선수 가운데 60세 이상이나 여자 선수가 끼어 있으면 1점을 얻고 들어간다. 막바지에 이르면 하룻밤을 잡아 디스코 경연대회를 펼친다. 동서양의 남녀노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흥겹게 몸을 흔들며 대국의 피로를 날려 버린다.
○…독일 할아버지 크뤼게는 아마 3단. 올해로 43번째 출전이다. 43년 동안 빠짐없이 참가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 구경하러 왔던 40여 년 전 그때의 기억이 까마득하다. 요즘은 손자의 손을 잡고 참가한다. 바둑을 40년 두었는데, 아직 아마3단이니 재주가 메주라면서 웃는다.
○…프랑스의 장(Jean) 부부. 노부부다. 부인은 바둑을 전혀 모른다. 그러나 바둑에 빠진 남편을 위해, 남편을 따라 매년 동행한다. 장은 요즘 한국 바둑책을 불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매달려 있다. 그의 가방에는 <이창호의 신수신형> <충암연구보고서> 같은 한국 바둑책들이 들어있다.
▲ 1도 | ||
백 7단 장비 (한국) 대 흑 7단 알렉세이 라자레프 (러시아)
<제한시간 각 2시간30분, 덤 6집반, 2003년 8월 2일, 상트 페테르부르크>
(48…12, 50…43, 74…67, 95…65, 103…47, 105 205…75,
110 207…94, 111…100, 198…61)
204수 끝, 백 19집반 승.
장비 7단은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으로 현재 명지대 바둑학과 2학년. 이름이 삼국지의 장비와 한자까지 똑같다. 그러나 외모와 성격은 정반대여서 호리호리한 체격에 섬세한 성격이다.
라자레프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유럽의 강자. 수학 교수다. 한국기원 초단 샤샤 이전, 다년간 러시아의 제일인자로 군림하던 인물이다. 세계아마대회에 러시아 대표로 여러 번 출전했으며 한국에도 두어 차례 다녀간 적이 있는 친한파.
[1도]
좌하 방면 흑진에서 백이 42로 젖히면서부터 본격적인 전투 개시. 흑43∼51은 최강의 응전.
백52 이하로 살자고 움직여 여기가 때 이른 승부처가 되었는데, 백64 끊었을 때, 흑65쪽을 젖힌 것이 잠깐 한눈을 판 수로 결국 패착이 되었다. 백이 응수해 줄 것으로 본 것인데, 백이 외면하고 66쪽을 움직이자 일거에 이상해지고 말았다.
흑65로는 …
▲ 2도 | ||
흑1로 몰아야 했으며 이랬으면 백이 헤쳐 나오기가 간단치 않았다. 다음 백2에는 흑3으로 젖혀 놓고, 백4로 나오는 것에는 흑5가 좋은 수.
백의 응수가 잘 안 보인이는 장면이다. 계속해서 더 버틴다면 백6·8 정도인데, 흑9·11로 뚫고 13·15에서 17로 끊어 패다. 백A로 먼저 때리는 패이기는 하지만, 흑에게는 B라는 절대 팻감 하나가 있는 것이 자랑이다. 흑은 물론 패를 되때린 다음 만패불청인 것.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