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인생 40여 년 만에 사상초유의 실수로 실격 패당한 조훈현 9단. 그가 범한 실수는 바둑의 기본 규칙 중 하나인 ‘착수금지’ 위반이었다. | ||
지난 80년 일본 명인전 도전기, 조치훈 9단과 오다케 9단의 대국에서 도전자 조 9단이 팻감을 쓰지 않고 패를 따낸 것이 팻감 실격부문에서 가장 유명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당시는 조 9단이 기록자에게 “내가 팻감을 쓸 차례냐?”고 물었고, 기록자가 “그렇다”고 대답한 상황이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기록자에게 그런 것을 물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의 규정은 없었던 것. 일본기원의 판정은 “이번은 무승부로 하되, 이후로는 기록자에게 묻는 것을 금한다”는 것이었다. 도전기 사상 초유의 ‘판정에 의한 무승부 사건’이었다.
지난 87년 제6기 KBS바둑왕전 결승3번기. 조훈현 9단과 김희중 9단(당시 7단), 한국을 대표하는 속기파의 속기대결이었다. 제1국은 조 9단의 승리. 제2국에서는 김 9단이 반격해 1승1패. 마지막 제3국. 불꽃 튀는 난타전이었다. 김 9단이 다소 유리한 상황에서 중반 막바지에 천지대패가 생겼다. 조 9단의 패를 따내고 김 9단이 팻감을 쓸 차례. 기록자가 초을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입니다… 하나, 둘 …”
그런데 어쩐 일인지 김 8단은 둘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았다. 조 9단은 묵묵히 바둑판에 얼굴을 묻은 채 팻감 계산에 몰두해 있는 모습. 당황한 것은 기록자였다. 대국에 관계되는 일체의 조언은 반칙이므로 김 9단에게 둘 차례라고 말을 해 줄 수도 없다. 초읽기를 중단할 수도 없는 일. 결국 기록자의 입에서는 “여∼얼!”이 떨어졌다.
김 9단이 깜빡 착각하고 있었던 것. 그러다가 기록자가 “마지막입니다. 여덟, 아홉…”을 부르는 데도 조 9단이 태연한 것을 보고는 그제야 자신이 둘 차례인 것을 깨달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으니, 세계 최고의 속사 김 9단이기는 하지만, 그의 손이 바둑돌 통 속으로 들어가 바둑돌을 집어 판 위에 갖다놓기 전에 “열” 소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TV기전 사상, 시간초과 실격패로 타이틀이 결정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실격패는 대국시간에 지각하는 경우에 종종 발생하는 사고다. 한국기원 공식대국은 아침 10시에 시작되는 것이 관례다. 요즘은 국제기전은 9시30분에도 시작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10시다. 지각하면 지각한 시간의 2배를 공제당하며, 1시간을 늦으면 실격패다. 11시까지는 대국장에 들어와야 하는 것.
이게 한동안 애매한 규정으로 예전에는 가끔 프로기사와 한국기원 진행자 사이에 11시가 안 넘었다, 넘었다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라디오 시보였다. 11시가 가까워지면 진행담당자가 라디오를 들고 대국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후 시간에 대한 다툼은 없어졌다.
그런데 한 쪽이 지각한 대국 경우, 상식적으로는 헐레벌떡 지각한 사람이 불리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 재미있다. 아슬아슬하게 입장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그를 기다린 사람이 불리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아, 잘 하면 기권승, 실격승이구나 기대하고 있다가, 기대가 무너질 때 심리적으로 더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란다. 프로바둑의 세계에서 1승 올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아는 사람은 안다.
▲ [1도] | ||
10월2일 제15기 기성전 본선16강전, 바둑황제 조훈현 9단과 신예 강자 최철한 5단의 대국, 조9단이 흑이다.
겁 없는 신예 최5단이 삼각표시된 백(실전 84)으로 네모로 표시된 흑의 대마에 강력한 경고를 보냈는데도 황제 조 9단은 쳐다보지도 않고 하변에 자물쇠를 채워 버렸다(흑 삼각표시).
백(삼각표시된)은 엄포, 잡을 테면 잡아 보라는 것. 파워테스트다. 황제는 좌하귀 흑A의 비상구를 보며 미소 짓는다.
그러면 할 수 없다는 듯 백1로부터 잡으러 가는 최5단.
▲ [2도], [3도] 위부터 | ||
흑3으로 궁도를 넓혀 놓은 후 좌하귀로 손을 돌린 황제는 7 먹여치고 9로 꼬부려 패를 만들어 보인다.
흑이 한 수 늦은 패이기는 하지만, 살자는 팻감은 부지기수다. 게다가 백도 패에 지는 날이면 좌하귀 전체가 떨어진다. 황제의 뜻은 서로 살자는 것이었으리라.
[3도] 착수금지
백1로 패를 때렸다. 흑2는 팻감. 백5로 받기 전에 하변 백3으로 물어본 것은 팻감 마련 작업. 흑4는 이상해 보이지만 정수. 흑A로 받으면 백B가 있다. 아무튼 백5 다음 흑은 삼각표시한 곳을 되때리면 되는 것. 그런데 흑돌은 이 자리가 아니라 6의 곳에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는 착수금지의 곳 … ㅎㅎ….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착수금지의 곳을 통과할 수는 없는 것. 이로써 조 9단은 자신의 신기록·진기록 뷔페에 ‘착수금지의 곳 착수, 실격패’라는 또 하나의 ‘명품’을 추가했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