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의 조혜연 4단(왼쪽)이 여류명인전 도전3번기에서 루이나웨이 9단을 꺾고 선승을 차지했다. | ||
올 초만 하더라도 한국 여류 바둑계의 세대교체는 요원한 일인 것 같았다. 그렇게 보는 사람이 많았다. 한국 여류프로 동네에는 중국에서 온 ‘철녀’ 루이나이웨이(芮乃偉·40) 9단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류 동네에서만 보자면, 루이의 철옹성은 이창호의 철옹성보다 오히려 더 굳건한 그것이었다. 중국의 마녀 루이 9단이 남편 장주주(江鑄久) 9단과 함께 한국에 건너와 한국기원 객원기사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 1999년 3월. 루이 9단이, 전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에 건너와 소속만 바뀐 채 계속 활동했다는 뜻이 아니다. 루이는, 직전까지는, 고향과 모국을 떠나 미국 일본 등지로 전전하던 처지였다.
세계 바둑계에서는 그들 부부를 ‘바둑 집시’라고도 불렀다. 참으로 눈에 띄는 특이한 커플이었다. 부부가 모두 프로기사라는 것만 갖고는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 부부는 모두 세계 정상급에 속하는 실력자들이었다. 더욱이 루이 9단은 남자 정상급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는, 여류로서는 무서운 실력의 소유자였다. 기풍 또한 웬만한 남자 몇이 한꺼번에 덤벼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정도로 호전적인 그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고 뜯는 스타일. 그런 강심장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마녀’니 ‘철녀’니 하는 살벌한 것들로만 붙여졌겠는가. 외모는 호리호리하고 말을 시켜보면 부끄러움도 많이 타는데, 바둑판 앞에만 앉으면 마치 헐크처럼 변하니 모를 일이다.
▲ 조혜연 4단 | ||
남편 장 9단도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초반 세계 최고급의 국제대결로 각광받았던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4연승인가 5연승인가로 깃발을 날린 실력자였는데, 부인이 워낙 유명인사가 되는 바람에 부인 그늘에 묻힌 느낌이 있다.
아무튼 루이의 한국 상륙은 그녀의 본격 활동 개시를 의미한 사건이었다. 이후 한국 여류 바둑계는 루이의 독무대가 되었다. 1999년 3월 그 무렵은 한국 여류 바둑계가 도약의 계기를 모색하던 시절이었다. 여류 입단대회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여류기전이 생겨났다. 한국 남자 바둑이 세계 바둑계를 호령하는 것에 고무되어 ‘보해배’ 같은 여류 세계대회(현재는 ‘정관장배’가 세계 여류 타이틀의 대통을 잇고 있다)도 출범했다. 그 모두가 결과적으로 루이를 위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핵펀치에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도 한 차례씩 다운을 당했으며, 한국 바둑의 상징 ‘국수’ 타이틀이 그녀에게 넘어가기도 했다. 그녀는 남녀를 불문코 한국 바둑계를 한 차례 들었다 놓은 ‘상하이 허리케인’이었다. ‘이게 무슨 망신이냐’ ‘루이만 좋은 일 시킬 거냐’ 하는 얘기들이 나왔다. 루이는 잘못 수입한 황소개구리, 한국 바둑의 생태계 파괴를 우려하는 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그런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조혜연 4단 같은 순국산 낭자가 마침내 루이를 꺾고 있다. 그 낭자의 친구들은 중국과 일본의 여류들을 가볍게 물리치고 있다. 이제 한국 바둑은 여류도 세계 바둑계를 좌지우지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게 따지고 보면 ‘루이 쇼크’에 의한 ‘일대 분발의 효과’ 아니겠는가.
루이가 무너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루이는 올해 나이 40. 루이가 아주 무너져 버릴지는 조금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이제 적어도 ‘루이 독주’의 시대, ‘마녀의 철권 통치’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2003년의 뉴스 가운데 하나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