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달성은 고사하고 친구이자 적인 김호철 감독한테마저 백기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자 신 감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LG정유처럼 69연승에서 멈춰버린다면 지금까지 고생한 보람이 없다는 판단에 선수들을 무섭게 독려했고 결국엔 3-2로 역전승을 거두며 70연승을 달성, 국내 배구 최다연승의 대기록을 작성하고 말았다.
어느 해보다도 부침 많은 시즌을 보내고 있는 신 감독은 ‘대전의 혈투’를 마치고 용인 숙소로 돌아온 뒤 비로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었다. 신 감독한테 70연승 기록 달성의 ‘빵빵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부탁하자 신 감독은 올 시즌 자신을 옥죄었던 ‘사건’들 외엔 이전의 ‘아픔’은 기억나지 않는다며 그 내용을 털어놓았다.
“만약 69연승으로 타이 기록만 올리고 끝낸다면 정말 한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은 무조건 이기고 싶었다. 그런데 초반에 덜미를 잡히고 보니 ‘이게(기록 달성이) 쉬운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철용 감독도 체육관 터가 세다며 기록 달성에 따른 걸림돌을 얘기했고 우리도 LG정유처럼 대전에서 참패할 수도 있다는 상념들이 괴롭혔다. 하지만 현대한테 질 거라곤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3년여 전인 2001년 1월2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슈퍼리그에서 상무한테 뼈아픈 패배를 당한 이후 1월7일 대한항공전 승리 이래 70회 동안 단 한 번도 ‘역주행’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스포츠 경기의 함수관계를 따져볼 때 엄청난 대기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삼성의 일방통행식 승리로 인해 신 감독은 매번 우승 이후에도 칭찬과 비난이라는 상반된 반응 속에 지독한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하도 많이 이기니까 견제도 많고 욕도 많이 먹고 정말 피곤하고 힘들었다. 우리 팀이 도둑질해서 우승한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말들이 많은지 정말 모르겠다. 우승은 거저 얻는 게 아니다. 솔직히 부상으로 김세진과 신진식이 빠진 삼성화재는 다른 팀의 전력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런 상대를 뛰어넘지 못하는 다른 팀에 문제가 있으면 있는 거지….”
신 감독은 여전히 결과물에 대한 칭찬에 인색한 배구계의 풍토에 대해 서운함이 한가득이었다. 이젠 익숙해지고 무뎌졌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저런 ‘뒷담화’를 듣다보면 부아가 치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 부상으로 빠진 김세진(왼쪽)과 신진식. | ||
“내 양심을 걸고 하는 얘긴데 (김)세진이와 (신)진식이가 빠진 삼성화재보다 현대 전력이 훨씬 낫다. 하지만 아무리 구성원이 훌륭해도 그걸 제대로 엮어내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김호철 감독이 현대를 맡은 뒤 그런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거고 지금 그 결과가 조금씩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현대나 LG가 우리를 못 이길 이유가 없다. (세진이와 진식이가 빠진) 지금 상황에선.”
시즌 중 삼성의 수석코치에서 LG화재로 옮겨간 ‘제자’ 신영철 감독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신 감독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처음으로 속내를 내비쳤다.
“신(영철) 감독을 탓하진 않는다. 단 시즌 중에 상대팀 코치를 빼간 LG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17년 동안 나와 함께 일하며 고생 많이 한 친구다. 내가 잡는다고 해서 뭔가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누구든 그런 제의가 오면 당연히 욕심이 날 수밖에 없다. 처음 그 얘기가 나온 날, 신 감독이 날 찾아왔더라. 그래서 ‘LG 사람을 만났느냐’고 물었고 ‘만났다’는 대답에 ‘가기로 마음먹었냐?’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는 말을 듣고 ‘그럼 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딱 한마디만 했다. 감독은 참으로 외로운 자리라고. 나쁜 건 다 감독이 책임져야 한다고….”
신 감독은 그 무렵 고혈압 증세로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항간에선 신영철 감독의 LG행으로 인한 마음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나타냈지만 신 감독은 ‘전혀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절친한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이 여러 가지 ‘사건’들과 겹쳐 스트레스를 안겨줬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가슴을 울리는 명언을 남겼다.
“신 감독은 오르막 세대고 난 이제 내리막 신세다. 서글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신 감독이 LG로 떠나면서 나한테 많은 ‘선물’을 주고 갔다. 코치가 없으니 선수들과 예전처럼 함께 뛰고 호흡하면서 연구도 많이 하고, 의욕도 늘고, 더 열심히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이 나이에 새로 시작한다는 기분, 맛보지 않고는 모를 것이다.”
신 감독은 이번 시즌에도 팀이 위기에 봉착한다 싶으면 선수들을 이끌고 소주잔을 꺾으며 “오늘 모두 죽어 뿔자”라고 외치는 ‘음주전법’을 적절히 사용했다고 실토했다.
예전처럼 ‘꼬장’ 부리는 선수가 나타나면 곧바로 ‘보내버린다’는 소문이 나서 그런지 요즘엔 속 썩이는 선수가 없다며 재미없어(?) 하는 신 감독의 또 다른 도전은 벌써 시작됐다. 시즌 10연패(2003년까지 슈퍼리그 7연패) 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