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겨울 계약문제로 구단과 마찰을 빚은 박정태 | ||
지나온 그의 행적이나 성격으로 볼 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이상훈처럼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명예로운 은퇴가 아닌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요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급 선수들이 구단의 압력 등으로 은퇴를 결정하거나 마찰을 빚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은퇴의 기로에 선 선수들과 구단의 줄다리기, 그 내용을 살펴본다.
이상훈의 갑작스런 은퇴로 잠잠했던 은퇴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선수는 바로 유지현(33·LG)과 박정태(35·롯데)다. 이들은 2004 시즌이 시작되기 전 FA가 된 선수들로 이미 구단과 한차례 마찰을 빚은 적이 있다. 구단측에서는 떨어진 활용가치 때문에 높은 연봉의 FA계약이 부담스러웠지만 구단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선수라는 타이틀로 인해 쉽게 내치기도 어려웠던 것.
현재 유지현의 경우 이미 은퇴를 결심했다는 이야기가 LG구단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가운데 공식 입장은 밝히지 않고 있으며 박정태는 2군에서 절치부심하며 재기를 노리고 있다.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주변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선수들이 쉽게 은퇴를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선수들의 생명 연장에 대한 강력한 의지 때문이다. 박정태는 “FA계약을 맺으면서 10년 넘게 사랑해주신 팬들과 멋지게 은퇴하기로 약속을 했다. 반드시 정상에서 은퇴하겠다”며 “지금 당장의 은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물론 전성기 때의 실력을 회복하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프로선수이기에 프로의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다는 이야기다.
지난 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했던 LG 농구단의 강동희 코치(38)도 은퇴를 결심하면서 “더 뛸 수 있다”며 아쉬움을 표출했을 정도니 베테랑 선수들의 유니폼 고집은 선수만이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한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팔팔한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 상황에서 주전경쟁에서 밀리게 되면 냉혹한 프로세계의 생리상 속된 말로 끝장이다. 또한 미래를 설계해야하는 구단 입장에선 프랜차이즈 선수들의 자존심만 세워줄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선수와 구단의 입장차는 자칫 감정싸움으로 비칠 수도 있다.
롯데의 서정근 계장은 “선수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좋은 성적을 거둬야하는 구단의 입장 때문에 선수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는 없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 유지현(왼쪽)은 은퇴의 기로에 서 있다. 이상훈은 시즌도중 은퇴결단을 내렸다. | ||
국내프로구단의 여건 상 선수들에게 거액을 포기하게 만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에 구단에서는 코치직 보장이란 ‘당근’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수들의 입장에선 당장의 현실 앞에서 코치직 제의의 수락은 큰 고민거리임에 틀림없다.
강동희 코치의 경우처럼 1억원이 넘는 연봉을 보장받은 경우는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선수생활 연봉의 4분의 1 정도의 금액이라 성에 찰 리가 없다. 실제로 프로야구 구단의 코치 평균 연봉이 7천만원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스타급 선수들에게 자존심을 꺾으라는 것은 선수들을 두 번 죽이는 처사가 될 수 있다.
팬들의 성화 또한 무시 못할 요소다. 구단을 위해 10년 넘게 봉사한 선수들을 성적이 부진하다고 바로 내치는 것은 구단으로선 엄청난 비난의 화살을 감수해야 하는 일. 지난 시즌 박정태의 FA계약이 문제가 되었을 때 팬들의 강력한 역풍을 경험한 롯데 구단으로선 여전히 팬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LG 농구단의 경우 황성인(28)을 영입하면서 강동희의 입지를 좁게 만든 것은 강동희 압박용 카드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 샐러리캡 때문에 선수 구성 자체가 어려워지면서 몸값이 높은 강동희의 은퇴가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에 구단으로선 여러 장치를 만들어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LG의 김성기 우승지원팀장은 “전형수(25)가 입대하기 때문에 주전 가드가 절실히 필요했다. 황성인의 영입이 강동희의 은퇴를 위한 것이 아니다”며 구단의 은퇴종용을 부인했지만 여러 가지 정황상 강동희 코치의 은퇴가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결국 은퇴를 결심하는 것은 선수들의 몫으로 돌아오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복잡한 역학관계가 얽혀 있다. “구단과 선수 모두가 살 수 있는 상생의 묘안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하소연하는 관계자들의 말처럼 선수들의 은퇴 문제는 해가 지나도 풀기 어려운 실타래일 수밖에 없다.
최혁진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