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20일 박 대표가 한나라당 의원총회에 자리했다. 이명박 시장의 ‘황제테니스’ 해명 기자회견이 열린 이날 박 대표는 어떤 전략적 구상을 하고 있었을까(왼쪽), 지난 3월 20일 ‘황제테니스’ 파문 관련 기자회견을 가진 이명박 시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그런데 한나라당은 이해찬 전 총리의 골프 파문 때 당력을 집중해 대응했던 것과는 달리 이 시장 사태에 대해서는 ‘소극적’ 대응을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박 대표가 대권 라이벌인 이 시장의 추락을 수수방관하며 반사 이익을 누리고 있다는 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박 대표 측에서는 펄쩍 뛰고 있다. 여권의 ‘황제 테니스’ 강 서브에 ‘침묵’ 리시브로 조용히 대응하고 있는 박 대표. 그 ‘정치적 침묵’의 배경을 따라가 봤다.
“요즘 박근혜 대표는 이불 속에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당에 와서는 울음을 참지 못한다.”
최근 이명박 서울시장의 ‘황제 테니스’ 파문을 두고 한 친여 매체에서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해석을 이런 ‘농담’으로 표현하고 있다.
최연희 의원의 성추행 사건에 이어 이 시장의 테니스 논란이 불거지자 한나라당으로서는 악재가 겹친 형국이다. 그런데 이 시장 테니스 사건은 오히려 박 대표에게 돌파구를 마련해줄 것이라는 역설적 해석도 나온다. 박 대표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 같은 이야기까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올해부터 당내에 부쩍 확산된 ‘이명박 대세론’과 이에 대한 반작용이 자리잡고 있다.
수도권의 A 의원은 “박 대표는 사학법 개정안 투쟁에서 점수를 많이 잃었다. 의원들에게 강한 리더십을 심어주지 못했다. 또한 그는 계보정치를 없애겠다며 의원들 ‘관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의원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의원들이 박 대표에게 호감을 가지고 성심껏 도와주어도 자신의 측근으로 잘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니 의원들도 차츰 박 대표와 멀어지게 되고 자연히 눈길은 이 시장 쪽으로 가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이 시장에게 힘이 쏠렸던 이유를 밝혔다.
올 초부터 급격하게 이명박 대세론이 퍼지게 되자 박 대표 측근들은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조언을 여러 차례 했지만 박 대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박 대표의 모습에 주변에서는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다. 박 대표의 한 측근은 “최근 박 대표가 친척들 모임에서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할 것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동생 지만씨는 ‘지금부터 조직을 갖추고 경선 준비를 해야 하는데 너무 손을 놓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을 했던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박 대표로서는 사학법 개정에 삐걱거렸고 당내의 우호적 지원군을 확보하는 데도 실패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번 지방선거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으려 할 것이 확실해 보인다. 문제는 ‘어떻게’라는 방법론이다.
박 대표는 지난 3월 초 ‘지도력 부재’ 논란에 부쩍 시달렸다. 그 논란의 한가운데엔 다름아닌 대권 라이벌 이명박 시장이 있었다. 당시 이 시장은 “한나라당은 해변가에 놀러 나온 사람들 같다”며 현 지도부를 정면 비판하며 당내 입지 강화를 꾀했다. 이에 박 대표는 “이 시장은 이기주의자”라고 거칠게 맞받으며 기 싸움을 벌였다.
이런 와중에 이 시장의 ‘황제 테니스’ 파문이 터진 것이다. ‘박 대표가 이불 속에서 웃고 있을 것’이라는 일부의 얘기가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까닭도 이명박 대세론에 위기감을 느낀 박 대표 측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전략 기획 관계자는 “박 대표는 그동안 ‘뚜렷한 지도력이 없다’는 비판에 시달려왔다. 그래서 이번 이 시장 사건을 정치적으로 적절하게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 여당의 ‘이 시장 죽이기’에 적극 대응하지 않고 당외 문제라며 한 발 물러서 있다가 이 시장이 계속 코너로 몰려 상황이 심각해지면 ‘지방선거 대응책’을 구실로 ‘이 시장 구하기’에 나설 것으로 본다. 그렇게 되면 지방선거 대응에도 도움이 되고 이 시장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주었다는 우월적인 명분도 얻게 될 것 아닌가”라고 분석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박 대표는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뒤 7월 전당대회에서 이명박 시장과의 한판 승부를 통해 자신의 지지그룹인 김덕룡 박희태 의원 등을 관리형 대표로 민 뒤 대선 후보 경선에서 확실한 우세를 차지하려고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한나라당 내에서는 이 시장 사건에 대해 계파별로 미세한 온도차가 감지된다. 먼저 ‘친이’ 의원들은 이 시장을 위해 “당 차원에서 강력 대응해 차기 대권주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하지만 친박 의원들은 역설적으로 박 대표를 위해서 이 시장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차기 대권 주자인 이명박 시장을 대선 후보 경선 전까지 힘 있는 후보로 끌고 가야 박근혜 대표도 경쟁력 있는 후보로 살아남을 수 있다. 상대 후보가 약하거나 혼자 남아 대세론이 퍼지면 여당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아 견디지 못할 것이다”고 말한다.
한나라당으로서도 이 시장이 조기에 ‘무너질’ 경우 당의 대선 전략에도 중대한 차질이 생길 수 있다. 한나라당은 서로 색깔이 다른 박근혜 대표, 이 시장,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3각 구도를 흥행을 보장하는 ‘빅 카드’로 보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손학규 띄우기’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하자는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세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경선을 성공적으로 치러낸다면 국민적 관심 속에서 대선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장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당내 공감대가 있긴 하지만 한나라당의 ‘황제 테니스’ 파문에 대한 대응은 이중적이다. 이 시장 측은 방미 기간 중 그리고 귀국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박 대표와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에게 ‘황제 테니스’ 파문과 관련한 해명자료와 입장을 전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열린우리당의 정치성 공세를 방어하는 데 협조해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에선 테니스 파문 초기에는 이 시장과 관련된 공식 논평조차 내지 않았다.
이계진 대변인도 사건 초기에는 “이명박 시장이 한나라당 유력 대선주자이면서 광역자치단체장인 만큼 자신의 문제에 대해 자신이 방어하는 게 맞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시장이 해명하고 사과한 마당에 중언부언하는 것이 맞지 않다”며 당과의 선긋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박 대표는 이 시장 사건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재오 대표만이 ‘이 시장이 사과할 것을 사과해야 한다’며 여당의 공격에 미리 ‘예방주사’를 놓는 정도였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박 대표 측이 이 시장의 ‘해변가’ 발언 뒤 앙금이 가시지 않아 상황 대처에 미적거리고 있다는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박 대표 측은 펄쩍뛴다. 박 대표의 한 측근은 “여당이 제기하는 의혹의 내용 자체가 별 게 없다. 우리가 당 차원에서 대응하게 되면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우리당이 정략적으로 뻥튀기하려는 작전에 말려들게 되는 꼴이다. 서울시에서 충분히 방어가 가능한데 정치권까지 나서게 되면 불필요하게 확전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또한 이 측근은 박 대표가 이 시장 사건을 은근히 즐기는 게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치졸한 열린우리당의 공작원들이 지적하는 것이다. 내용도 별 게 없는데 박 대표가 나서서 싸움을 키우자는 말인가. 박 대표의 성품을 생각해 보면 이 시장의 추락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 안 된다는 것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건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로 판단하는 분이다. 다른 정치인들이면 몰라도 (박 대표는) 대권을 위해서 자신의 라이벌이 망가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의 박 대표 측근은 또한 “앞으로 여당의 정략적 이용이 극에 달하면 중앙당 차원에서 적극 대응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한나라당 정인봉 인권위원장이 최근 “이 시장이 테니스를 칠 때 테니스 대표선수가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는 정동영 의장의 주장은 허위사실로 고소와 고발을 심각히 고려 중이다”라고 말한 대목도 당 차원의 대응 의지를 엿보게 한다.
한 정치권 인사는 “박 대표가 이 시장의 곤경에 대해 어떤 스탠스를 취하는가와 이 시장의 추락이 한나라당 대권 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분명 별개의 문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시장이 이대로 추락할 경우 투톱에서 원톱을 형성할 박 대표에게도 그다지 유리하지 않다는 점이다. 일찌감치부터 집중 포화를 맞을 가능성도 높고 과거처럼 대세론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도 있다. 결정적 순간까지는 ‘이인삼각’경기처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야권 잠룡들의 숙명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박근혜 대표는 곤경에 처한 이명박 시장을 놓고 어떤 전략적 선택을 할까. 박 대표 ‘침묵’의 끝이 점점 궁금해진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