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동영 의장의 당권파와 이해찬 전 총리의 재야파가 소리 없는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다. | ||
여기에 재야파 리더격인 이해찬 의원의 당 복귀 이후 양측의 기 싸움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양측 모두 겉으로는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의기투합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지만 유리한 대권고지 선점을 위한 물밑 권력투쟁은 더욱 심화되고 있는 분위기다.
2·18 전당대회 이후 소강상태를 보였던 당권파와 재야파의 신경전은 3·1절 골프 파문으로 낙마 위기에 몰린 이해찬 전 총리의 거취를 둘러싸고 다시 표면화됐다. 정 의장을 중심으로 한 당권파는 “국민여론을 지켜보자”며 이 전 총리의 사퇴를 우회적으로 압박한 반면 김 위원과 장영달 의원 등 재야파는 “일관된 국정운영”을 명분으로 이 전 총리를 적극 옹호했다.
당권파 입장에서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골프 파문의 진화가 시급했던 데다 재야파로 노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이 전 총리의 건재가 내심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정 의장은 3월 14일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과 면담을 갖고 이 전 총리의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당내 의견을 전달했다. 사실상 정 의장이 ‘이해찬 사퇴’를 주도한 셈이다.
이 전 총리 사퇴 이후 당권파의 분위기는 한층 고조됐다. 재야파 리더격인 ‘실세 총리’가 낙마하면서 당권파의 당내 입지 및 대권주자인 정 의장이 명실상부한 여권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뤘다. 여기에 정 의장이 한명숙 의원을 후임 총리로 천거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노심(盧心)도 정 의장에게 쏠리고 있다는 관측이 일각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전 총리 낙마와 한명숙 총리 지명 배경에는 알려지지 않은 또다른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당권파와 재야파가 실리와 명분, 향후 대권구도 등을 놓고 보이지 않는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던 것.
실제로 이 전 총리 사퇴(3월 14일)에서 한명숙 총리 지명(3월 24일)까지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수뇌부는 이해득실을 따지며 숨가쁜 10일을 보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한명숙 카드’가 급부상하자 정 의장은 ‘여성총리’ 추천 사실을 공개(21일)하며 총리 인선 주도권 싸움에 가세했다. 재야파도 여성총리론을 역설하며 재야 출신인 한명숙 의원을 적극 지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명숙 의원이 후임 총리로 최종 낙점되자 당권파와 재야파는 서로 자신들의 입김을 강조하며 ‘한명숙 끌어안기’ 경쟁을 벌였다.
▲ 한명숙 총리 지명자.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정 의장이 당장의 실리를 챙긴 건 사실이지만 지방선거 이후 대권경쟁에서는 재야파가 주도권을 쥘 가능성 또한 ‘한명숙 카드’에 숨겨져 있다.
노 대통령의 복심도 한명숙 카드에 투영돼 있다. ‘이해찬 사퇴’와 ‘한명숙 총리 지명’은 노 대통령의 치밀한 국정운영 계획 및 대권관리 전략에 따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여기에 노 대통령이 한명숙 카드를 선택한 배경에는 이 전 총리의 입장과 건의가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전 총리는 노 대통령이 “임기를 같이하고 싶다”고 표현할 정도로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왔다. 골프 파문으로 이 전 총리가 사의를 표명했을 때도 노 대통령은 그를 놓지 않으려 했다. 결국 악화된 여론과 코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를 감안해 이 전 총리를 더 이상 붙잡지 못했지만 그에 대한 노 대통령의 신뢰와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을 것이란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노 대통령이 3월 26일 이 전 총리 부부를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하며 위로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시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 이 전 총리는 노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하는 자리에서 후임자로 한명숙 의원을 단수 추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야당의 반발 무마, 향후 국정운영 로드맵, 지방선거 시너지효과, 지방선거 후 본격화될 대권구도 등을 감안할 때 한명숙 카드가 최상의 선택이라는 부연 설명까지 곁들였다는 후문이다. 이 전 총리 입장에서는 정치색이 엷고 재야파에 가까운 한 내정자가 총리직을 수행하는 것이 자신과 재야파의 향후 정치행보에 도움이 될 것이란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노 대통령도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이 전 총리의 마지막 천거라는 점과 레임덕 방지, 대권주자 관리 등을 고려해 ‘한명숙 카드’를 수용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낙마하는 이 전 총리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소리가 나돌 경우 역풍에 휘말릴 소지가 다분해 물타기를 거듭한 끝에 한 내정자를 최종 낙점하는 수순을 밟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여성총리’ 추천 사실을 공개한 정 의장은 실제 노 대통령에게 자신의 대권입지 및 당 위상 강화 차원에서 김혁규 최고위원과 문희상 의원을 차기 총리에 우선 순위로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여성총리론’을 명분으로 한 내정자를 천거하긴 했지만 이는 후순위였다는 게 당 핵심부에서 흘러나오는 전언이다.
‘한명숙 카드’로 정 의장은 지방선거 상승 요인 등 당장의 실리는 얻었지만 그 최종 수혜자는 지방선거 이후를 기약하고 있는 김근태 최고위원 등 재야파에 돌아갈 것이란 분석도 이러한 견해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따라서 당 복귀 후 대권경쟁 합류, 킹메이커 역할 등 자신의 진로에 대해 목하 고심하고 있는 이 전 총리의 선택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전 총리가 직접 대권에 도전할 경우 재야파의 분열은 불가피할 것이나 킹메이커로 선회할 경우 재야파 대표주자인 김근태 위원의 대권행보가 더욱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 이 전 총리의 지난 행보로 보아 킹메이커 역할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정 의장과 당권파가 이번 지방선거를 1차적 대권 승부처로 삼고 ‘올인’하고 있는 것도 재야파의 이러한 대반격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겉으로는 모든 계파가 단결된 모습이 보이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당내 지분 및 대권구도와 맞물린 치열한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게 여권의 현주소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