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바람의 아들’ 이종범(34·기아)을 만난 날은 진짜 바람도 엄청 불고 소나기까지 내렸다. 지난 여름 원인 모를 슬럼프에 빠져 ‘야구천재’의 자존심을 짓밟히고 1번 타자에서 하위 타자로 내려가는 수모 아닌 수모를 겪은 그는 시즌 막판 천재의 부활을 알리며 이종범이란 ‘브랜드’의 가치와 의미를 재확인시키고 있었다.
이영미(영): 오랜만이에요. 제 기억으로는 지난 2001년 일본에서 복귀한 뒤 엄청난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닐 당시 인터뷰하고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이종범(종): 벌써 그렇게 됐나요? 세월이 많이 흘렀네. 그때만 해도 관중석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저로 인해 5천에서 6천 명 정도의 관중이 늘어났다는 통계까지 있었으니까.
영: 그런데 그 많은 관중들이 모두 어디로 가셨대요?
종: 저도 그 부분이 ‘겁나게’ 궁금하거든요. 아무래도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와 관련 있을 것 같아요.
영: 그러고보니 수염을 안깎으셨네요?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요?
종: 하하. 사실은 오늘 좀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수염 깎을 시간이 없었어요. 한 3일 길렀나? 아저씨가 되다보니 외모에 신경도 안 쓰게 되더라구요.
영: 지난 여름은 ‘야구천재’라는 수식어가 무색하리만치 성적이 형편없었어요.
종: 그땐 어떤 몸부림도 들어먹질 않았어요. 가끔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최악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정말 견디기 힘들었죠. 이대로 끝나는 건가 하는 두려움과 자괴감 속에 더운 여름을 보내야 했습니다.
영: 1번 타자가 5, 6, 7번으로 떨어지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잖아요. 자존심 많이 상했겠어요.
종: 말로 다 못하죠. 아마 그때는 2군 투수가 던진 공도 못칠 것 같은 기분이더라구요. 제 자신한테 실망을 많이 했어요. 팀을 이끌어 가야 할 선수가 이렇게 헤매고 있어도 되나 싶었죠. 팀 성적이라도 좋으면 부담이 덜했을 거예요.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영: 그래도 다시 살아나셨잖아요. 그게 이종범 선수의 진가 아닌가요?
종: 지금 성적이 좋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죠. 아마도 그런 형편없는 모습으로 야구를 접었더라면 제 인생에 큰 오점이 됐을 거예요. 제가 살아나는 것과 동시에 팀 성적도 좋아지고 있어 다행이죠. 쓴 경험이 약이 된 것 같아요.
종: 난 어렸을 때부터 1번을 쳐왔기 때문에 어떤 순간에도 뛸 준비가 돼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주자로 나가 있으면 포수와 투수가 긴장을 해요. 그런데 출루를 해야 상대 선수를 긴장시키죠. 나가질 못하는데 무슨 긴장을 줄 수 있겠어요. 제가 슬럼프에 빠질 때 (장)성호도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요즘은 조금 달라졌겠지만.
영: 어느새 우리 나이로 서른다섯이에요. 선수들이 30대를 넘어서면 ‘노장’이란 단어와 ‘체력 열세’라는 설명이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데 혹시 실감은 하세요?
종: 아뇨. 보통 기자분들이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나이 먹어 힘이 달린다’고들 생각하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사실 올 시즌 부진했던 이유는 체력 때문이 아니었어요.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았던 탓이죠. 체력은 나이 어린 선수보다 더 잘 뛰고 더 잘 할 자신이 있어요. 만약 체력적으로 문제가 됐다면 은퇴 여부를 심각히 고민했을 겁니다. 떨어진 자신감을 추스르는 게 급선무였어요. 자신감 없이 시즌을 마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다음 시즌에 엄청난 차이가 있거든요. ‘노장’ 운운하는 소리, 솔직히 기분 나빠요.
영: ‘야구천재’라는 엄청난 별명 때문에 스트레스 받은 적도 많죠?
종: 부담 많이 됐죠. 야구를 아홉 살 때 시작해서 26년을 해오고 있는 데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 같아요. 한 해 지나면 새로운 선수가 들어오고 고참들은 은퇴를 하는 서바이벌 세계에서 탈락하지 않고 이종범이란 이름에 걸맞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정말 노력 많이 해야 해요.
영: 야구장에서 보이는 이미지가 무척 강하고 엄숙해요. 가벼운 질문을 던지기가 좀 ‘거시기’ 하네요.
종: 하하. 절 운동장에서 만났으니까 그렇죠. 밖에선 저도 재미있는 남자예요. 경기장에선 승부 때문에 웃음보다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려고 애쓰는 편이에요. 그래야 상대 투수가 섣불리 승부를 못 거니까.
영: 방위 복무 하셨죠? 그 당시 뭐 재미있는 에피소드라도 있나요?
종: 에피소드 말하라고 하면 밤 새야 될 걸요? 전 광주 쭛쭛사단 출신이에요. 사단장이 별 두 개였는데 절 처음 보시곤 하시는 말씀이 ‘아무리 네가 야구 스타라고 해도 군대에선 내가 더 스타’라고 하시더군요. 말 되는 말이었죠. 배려 많이 해주셨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촬영을 위해 덕아웃 밖으로 나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이종범의 예상이 맞았다. 인터뷰 도중에 이종범이 하늘을 쳐다보며 ‘비가 올 것 같다’고 얘기했고 기자는 일기예보를 거론하며 ‘내일부터 비 온다’고 우겼던 것. 이종범이 한 마디 덧붙인다. “광주구장에서만 ‘짬밥’이 얼만데. 하늘만 봐도 이젠 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