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구 영웅 마라도나(왼쪽)와 펠레의 합성사진. 이들은 친자확인소송을 거쳐 자신의 혈육을 확인했다. | ||
‘소송의 천국’이라 불리는 미국답게 스포츠 스타들의 소송이 끊이질 않고 있다. 때로는 금전적인 이유로, 때로는 명예가 훼손됐다며 자신들의 권리를 ‘법의 힘’을 빌려 주장하는 스포츠 스타들. 그들도 때로는 골치 아픈 소송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스포츠팬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각종 소송들을 살펴보자.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손만 뻗으면’ 수없이 많은 여성들과 ‘불장난’을 할 수 있는 게 바로 스포츠 스타들이다. 이 때문에 젊은 시절 ‘하룻밤’을 보낸 뒤 훗날 소송에 시달린 스타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이 ‘축구계의 악동’ 마라도나(44).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뛰던 마라도나는 지난 80년대 이탈리아 여성 크리스티나 시나그라와 밀애를 즐긴 끝에 ‘주니오르’라는 남자아이를 얻었다. 물론 ‘악동’답게 마라도나는 주니오르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발뺌. 하지만 주니오르는 친자확인 소송을 벌였고 결국 마라도나는 자신의 아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재미난 것은 주니오르(18) 역시 현재 나폴리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 그는 아버지를 빼닮아 “소송이 아니더라도 아들인 줄 금세 알겠다”는 평을 듣고 있다.
마라도나와 달리 지금도 축구팬들의 한결같은 존경을 받고 있는 ‘축구 황제’ 펠레(64). 하지만 펠레 역시 인생의 오점이 없을 수 없다. 18세 때 자기집 가정부를 유혹해 관계를 맺어 딸을 낳았다. 브라질 산투스시 시의원으로 활약중인 ‘산드라’라는 이 딸은 친자확인 소송 끝에 ‘황제의 딸’로 인정받았다.
산드라가 얼마나 아버지에 대해 ‘한’(恨)이 맺혔는지는 그녀가 시의원 선거 당시 내세운 공약에서도 알 수 있다. “친자확인을 거부당한 어린이들에게 DNA검사를 해주는 법을 제정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던 것.
90년대를 풍미한 ‘테니스 황제’ 보리스 베커(36)는 친자확인 소송에 걸려 거액을 날린 케이스. 은퇴를 앞둔 지난 99년 7월, 아내와 심하게 다툰 베커는 홧김에 런던의 한 레스토랑을 찾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자리에 있던 생면부지의 러시아 모델 안젤라를 발견한 베커는 ‘작업’에 들어갔다. ‘부킹’에 성공한 두 사람은 얼마나 급했던지 레스토랑 청소도구실에서 그야말로 ‘바지만 내린 채’ 5초 동안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다.
‘원나잇 스탠딩’에 성공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로부터 9개월 후 안젤라가 베커 앞에 나타났다. 베커를 꼭닮은 여자아기를 안고서. 친자확인 소송 끝에 베커의 딸임이 확인됐고, 베커는 위자료와 양육비조로 무려 3백50만달러를 물어줘야 했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3월 ‘친자 거부’가 아닌 ‘양자 거부’ 소송이 화제를 모았다. 바로 프로야구 한신의 감독을 지낸 노무라 가쓰야(69)가 낸 소송이다. 노무라는 ‘타격의 신’, ‘일본 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직장 상사’로 꼽히며 ‘노무라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
지난 80년 노무라는, 혼자 아들 케니를 키우고 있던 ‘사치요’라는 여성과 재혼을 했다. 사치요 역시 거침없는 입심으로 방송가의 단골 게스트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잘 나가던 노무라 부부에게도 시련은 닥쳤다. 지난 2001년 사치요가 탈세 혐의로 방송가에서 퇴출되고, 노무라 역시 한신 감독직을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아들 케니가 부모를 비방하는 모습에 화가난 노무라 감독이 ‘양자 파기’소송을 냈고 법원은 노무라 감독의 손을 들어준 것.
‘유명인과 같은 이름’ 덕분에 벌어진 황당한 소송도 있다. 지난 2003년 당시 메이저리그 야구단 시카고 컵스의 투수였던 ‘마크 거스리’의 이야기다. 시카고 컵스의 모기업인 <시카고 트리뷴> 신문사는 세 차례에 걸쳐 거스리의 통장으로 연봉 30만달러를 입금했지만 거스리는 “못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상하게 여긴 신문사가 자체 조사를 벌였다. 알고보니 ‘투수’ 마크 거스리에게 입금돼야 할 30만달러가 신문사의 ‘배달사원’ 마크 거스리에게 입금된 것.
신문사측은 즉시 조치를 취해 27만5천달러는 회수했지만 나머지 2만5천달러는 ‘배달사원’ 거스리가 계좌를 동결시키는 바람에 되찾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신문사가 낸 소송이 진행중이지만 배달사원 거스리는 “신문사의 책임”이라며 버티고 있다.
작게 시작한 개인의 소송이 훗날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1974년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에이스 캣피쉬 헌터는 시즌이 끝난 뒤에도 팀으로부터 5만달러의 연봉을 받지 못하자 소송을 냈다. 결국 다른 팀과 계약할 수 있다는 법원 판결을 얻어낸 헌터는 곧바로 뉴욕 양키스와 3백70만달러짜리 입단계약을 맺었다. 이후 스포츠계에선 일반화된 ‘자유계약선수’(FA)의 효시였다.
이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