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지성(왼쪽), 박주영 | ||
이회택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박지성과 박주영의 차이는 ‘전천후 포지션 가능(박지성)’과 ‘공격 포지션(박주영)’으로 확연히 구분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박지성이 수비에서 포워드까지 골키퍼만 제외하고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반면 박주영은 공격형 미드필더와 최전방 공격수로 활용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수원남산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를 시작한 박지성은 수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명지대 2학년이던 2000년 6월 일본 J2리그 교토퍼플상가로 진출했다. 이후 2002월드컵을 거쳐 히딩크 감독을 따라 네덜란드 에인트호벤으로 옮겼다.
박지성을 대표팀에 발탁한 인물은 허정무 현 전남 감독이다. 1999년 3월 명지대 1학년이던 박지성은 올림픽대표팀과 연습경기에서 허 감독을 매료시킨다. 허 감독은 “원래 다른 선수를 보러갔는데 박지성이 눈에 띄었다”면서 “볼에 대한 감각과 지능이 뛰어났다”고 회상했다. 다만 힘이 약했지만 폐활량이 좋아 가능성을 높이 샀다고.
허 감독은 박지성의 일본 진출 뒷얘기도 공개했는데 당시 대학생으로 아무런 경력이 없었던 박지성을 추천한 이가 바로 허 감독이었다. 허 감독은 “교토 퍼플상가 강화부장이 와서 선수를 보여달라고 부탁해 박지성을 추천했다”고 소개했다. 박지성의 부모는 고맙다면서 허 감독에게 김치까지 담가 보내왔다고.
허 감독은 “처음 박지성을 발탁했을 때는 여론의 질타를 많이 받았다. 심지어 명지대 감독과 개인 친분때문이란 악소문이 돌아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털어놨다.
박지성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꼽으라면 히딩크 감독과의 만남일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2001년 1월 칼스버그컵 파라과이전 때 박지성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첫 출전시켰다. 박지성은 2001년 컨페드컵 호주전에서는 왼쪽 미드필더로 출전했다. 또 중국과 평가전에서는 오른쪽 윙백이었던 점을 기억한다면 박지성의 포지션은 딱히 하나로 규정하기 힘들 정도다.
히딩크 감독은 여러 포지션을 시험해본 뒤 박지성에게 미드필드 중앙에서 공수전환을 맡아 경기 조율을 하는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부여했다. 박지성은 에인트호벤에서도 대표팀과 포지션을 뛰며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박주영은 청구고를 졸업하고 2004년 고려대에 입학한다. 1학년을 마치고 올 초 FC서울로 입단해 K리그에서 박주영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조광래 전 FC서울 감독은 “박주영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영입하려 했지만 박주영의 아버지가 대학 생활을 1년이라도 시키겠다는 뜻이 강했다”고 털어놨다. 조 감독이 본 박주영은 영리한 선수였다. 고등학교 시절이었지만 패스와 드리블이 깔끔했고 슈팅력도 좋았다. 당장 프로에 데려와 공격형 미드필더와 공격수로 뛰게 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반야월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에 입문해 청구중에서 뛰던 박주영은 같은 재단의 청구고로 진학했다. 청구고 변병주 감독은 “영리했고 기초도 좋았지만 특출나지는 않았다. 고3 때부터 힘이 붙으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며 박주영이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가 아니라 노력이 뒷받침된 천재라고 평가했다.
고1 때 4월부터 12월까지 브라질 연수를 다녀온 뒤 박주영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변 감독은 “그라운드를 마치 위에서 쳐다보듯 머릿속에 그림을 그릴 줄 안다”고 표현했다. 순간적인 판단을 요하는 경우 대부분 선수들은 당황해서 볼을 황급히 차거나 백패스를 하는데 박주영은 정확한 공간패스를 하거나 직접 해결을 한다는 것이다.
박주영은 고1 때는 오른쪽 사이드공격, 고2 때는 미드필더, 고3 때는 공격형 미드필더와 포워드로 지금의 포지션을 맡는다. 공격포지션은 모두 박주영의 자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변현명 스포츠투데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