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부상과 길고도 지리한 싸움을 벌여왔던 박찬호가 ‘4월의 레인저스’로 선정되는 등 최근 부활의 플레이를 펼치며 선전하고 있다.서울신문 | ||
올시즌 마운드에서 박찬호의 상승세를 주도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홈런’ ‘땅볼’ ‘좌타자’ 등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지난 3년간 부상으로 인해 부진했을 때 박찬호를 가장 괴롭힌 것은 홈런이었다. 지난해 박찬호는 95와2/3이닝 동안 총 22개의 홈런을 허용, 9이닝당 2개 이상의 장거리포를 얻어맞았다. 17타수마다 1개씩 홈런을 맞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대량 실점을 해 늘 패인이 됐다. 그러나 올해는 6게임에서 34이닝 동안 총 129타수에서 4개의 홈런만을 허용, 9이닝당 홈런이 1개로 현격하게 줄었다.
홈런이 줄어든 것은 그만큼 플라이보다 땅볼 유도가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박찬호는 지난해 플라이볼 1개당 땅볼 비율이 1.18개로 늘 그렇듯이 플라이볼 투수로 분류됐었다. 그러나 올해는 플라이볼과 땅볼의 비율이 33~48로 땅볼 비율이 1.46으로 아메리칸리그에서 15번째로 그라운드볼이 많은 투수로 변신했다.
땅볼이 나오면 일단 장타가 나올 확률이 사라진다. 웬만한 큰 플라이볼은 홈런으로 연결되는 텍사스 홈구장 아메리퀘스트필드에서는 땅볼이 투수들에게 가장 친한 친구인 점을 감안하면 땅볼 투수로의 변신은 박찬호 부활에 필수불가결하다.
또 하나의 변신은 ‘천적’이었던 왼손타자에 대단히 강해졌다는 점이다. 상대 감독들은 올해도 박찬호의 오랜 약점을 파고들려고 라인업에 왼손타자를 대거 기용하고 있다.
그러나 2년 전까지만 해도 좌타자를 상대로 피안타율 3할6푼7리로 난타당했던 박찬호는 올해 오른손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2할7푼8리(54타수 15안타)인데 반해 왼손타자를 상대로는 피안타율 2할1푼2리(75타수 16안타)로 오히려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다.
왼손타자의 몸쪽으로 가다가 스트라이크존에 박히는 역회전 투심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고, 낮게 깔리는 제구력이 몸에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땅볼이 늘고 홈런은 줄고 좌타자에는 강해진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박찬호가 에이스의 면모를 과시하자 타선도 살아나고 있다. 사실 박찬호는 다저스 시절에는 지독히 타선 지원이 없던 투수 중의 한명이었다. 워낙 다저스가 타력보다는 투수력과 수비력을 앞세운 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텍사스는 전통적으로 타력이 강한 팀인데도 그동안 박찬호는 득점 지원을 그리 많이 받지 못한데다, 박찬호가 마운드에 서면 엉뚱한 실책들이 종종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 이면에는 팀 내에서 최고 연봉을 받는 박찬호가 계속된 부상으로 마운드에서 제 몫을 해주지 못한 데 대한 동료들의 불만과 시샘도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박찬호 역시 홀로 괴로움을 달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 박찬호(가운데)와 텍사스 레인저스 선수들. 서울신문 | ||
올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텍사스의 언론은 대단했다. 오프 시즌이 시작되자 박찬호를 트레이드해야 한다며 온갖 소문의 진원지가 됐지만, 사실 2년간 3천만달러 가까운 계약이 남은 박찬호의 남은 2년 몸값을 감안하면 트레이드는 애당초 불가능이었다. 결국 박찬호가 팀에 잔류하자 이번에는 박찬호가 초반에도 제 몸값을 하지 못한다면 아예 돈을 포기하고 방출시키는 것이 팀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물고 늘어졌다.
그러다가 시범 경기부터 분위기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박찬호가 부활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앞장서서 박찬호 때리기의 선봉에 섰던 <댈러스 모닝뉴스>까지 박찬호에게 올시즌 기대를 건다는 논조의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군의 4월을 마치고나자 현지 언론은 점입가경의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스타텔레그램>은 ‘박찬호의 몸값이 오르기 전에 계약을 연장하라!’는 칼럼을 쓰는가하면 <댈러스 모닝뉴스>는 ‘박찬호가 텍사스의 1선발’이라며 치켜세웠다. 텍사스 언론들은 요즘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박찬호의 앞날에 장밋빛 전망을 내놓으며 박찬호 띄우기에 한창이다.
팬들 역시 백팔십도 변했다. 팬들에게는 자기 팀 선수가 못할 경우 야유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박찬호는 지역 언론의 일방적인 뭇매 속에 팬들에게도 정도 이상으로 푸대접을 받아왔다.
그런데 지난달 14일 알링턴의 아메리퀘스트필드에서 벌어진 LA 에인절스와의 경기에서 박찬호가 6과2/3이닝 동안 강타선을 3실점으로 막고 교체돼 마운드를 내려가자 홈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치며 에이스의 부활에 찬사를 보냈다. 모자를 벗고 팬들의 성원에 가볍게 답례를 보내는 박찬호의 모습을 다저스 시절 이후 처음으로 다시 보는 ‘감격시대’나 다름 없었다. 그 기립 박수는 30일 보스턴 레드삭스전의 호투 뒤에도 똑같이 이어졌다.
투수들이 마운드에서 자신감이 결여되면 가장 먼저 타자들에게 간파 당한다. 자신없이 던지는 160km 강속구는 때론 자신만만하게 던지는 145km 직구보다 위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투수가 자신만만하면 타자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지난 3년간 박찬호는 마운드만 서면 작아졌다.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자신감이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마운드에 오르니 자신의 공에 대한 자신감이 있을 리가 없었고, 공 자체의 위력이 떨어진 것도 있었지만 같은 구속의 공이 들어가도 위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투수의 위력을 재는 척도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 이닝당 안타수를 따져보면 어느 정도의 위력이 있는지 금방 드러난다.
MLB에서도 이닝수보다 안타수가 적은 투수는 일단 인정을 받는다. 박찬호는 다저스 시절 1999년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한 시즌도 이닝수보다 안타수가 많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텍사스 이적 후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 됐다. 2002년 145와2/3이닝 동안 154안타를 맞은 박찬호는 2003년에는 29와2/3이닝 동안 34안타를 허용했고, 작년에도 95와2/3이닝 동안 105안타를 맞았다. 일단 1이닝당 한개 이상의 안타를 맞는데다 4사구 등이 더해지면 승리의 확률은 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올시즌 박찬호는 34이닝 동안 31개의 안타만 내줬다. 일단 마운드에 오르면 타자들을 잡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 넘치는 피칭이 눈에 띈다. 사실 올시즌 초반 박찬호 상승세의 가장 큰 원동력은 자신감의 회복이라고 볼 수 있다.
4월에 3승1패를 거둔 것은 박찬호의 MLB 생애 중 최고의 스타트다. 지난 10년간 4월에 3승을 거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2000년과 2001년 4월에 각각 3승2패로 출발해 18승과 15승을 거뒀다.
남은 시즌 거의 30번 가까운 등판을 남겼으니 수치상으로는 20승도 거둘 기세다. 그러나 ‘20승은 하늘이 내린 승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행운도 따라 줘야한다. 현재 추세라면 박찬호가 다시 15승대 투수로 일어설 가능성이 충분히 보인다. 우선은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 허리 통증에서 벗어나면서 되살아난 현재의 역동적이고 간결한 투구폼을 유지해야 한다. 건강만 따라 준다면 지난 3년간 텍사스에서 거둔 총 승수(14승)보다 많은 승리를 올해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민훈기 스포츠조선 야구팀 부장 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