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호의 지난 10년간 변화. 왼쪽부터 1994년 데뷔 시절, 2001년, 2002년 텍사스 이적, ‘부활’한 최근 모습. | ||
메이저리그 생활 10년. 1승을 거둘 때마다 침실에 진열하고 있는 ‘승리 공’들이 드디어 1백 개가 됐다. 박찬호(32·텍사스 레인저스)는 지난 5일(한국시각) 카우프만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원정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대망의 100승을 거뒀다. 차곡차곡 쌓인 승리들이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을 리 없다. 그렇지만 유난히 감회가 크고 기억에 남는 승리들이 있다. 반면에 너무 안타깝고 아쉬웠던 패전들도 많다. 박찬호가 걸어온 승리와 패전을 되돌아본다.
박찬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경기 중 첫 번째는 1994년 4월9일 다저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애틀랜다 브레이브스전이다.
당시 갓 스무 살의 루키 박찬호는 불펜에서 대기하다 토미 라소다 감독의 등판 준비 지시를 받았다. 허겁지겁 몸을 풀고 좌익수 펜스 뒤쪽의 불펜에서 마운드까지 어떻게 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흥분되고 떨리는 빅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무릎이 후들거리고, 포수가 뿌옇게 보이는 가운데 첫 두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낸 박찬호는 현재 애틀랜타의 타격 코치로 있는 테리 펜들턴에게 적시 2루타를 맞고 2점을 내줬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박찬호는 하비 로페스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빅리그 첫 K’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날이 박찬호에겐 메이저리그의 마운드를 처음으로 밟아본 더욱 소중하고 기념비적인 경기로 남아있다. 그리고 시간이 훌쩍 흘러 1996년 4월7일 시카고 커브스의 홈구장인 리글리필드.
2년간 마이너에서 수련을 쌓다가 빅리그에 가세한 박찬호는 유난히 추운 날씨로 더그아웃이 아닌 클럽하우스 안에서 TV로 경기를 보다가 갑작스럽게 마운드에 오른다. 선발 라몬 마르티네스가 타격을 하고 1루로 달리다 허벅지 부상을 당한 것. 박찬호는 4이닝 동안 삼진 7개를 잡으며 무실점 역투를 벌여 사상 최초로 빅리그에서 승리한 한국인 투수가 됐다. 경기가 끝난 뒤 좁은 커브스 라커룸에서 기자들에 둘러싸여 인터뷰하던 박찬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4월12일 홈으로 돌아온 박찬호는 사상 첫 선발 등판에서 플로리다의 케빈 브라운과 격돌했다. 5이닝을 1안타 삼진 5개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박찬호에겐 생애 최초의 선발승이라는 기분 좋은 결과였다.
1998년에 박찬호는 생애 처음으로 한 시즌 15승 고지에 올랐다. 15승대 투수라면 엘리트 중의 엘리트임을 인정받는다. 전반기 6월 말까지 5승5패로 그저 그런 시즌을 보내던 박찬호는 6월28일 피츠버그전을 시작으로 5연승 가도를 달린다. 6과⅔이닝 동안 안타를 10개나 맞고도 2점밖에 내주지 않는 행운의 승리를 시작으로 연승 가도 중에는 7월3일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인터리그 경기에서 8과⅓이닝 1실점의 역투도 포함됐다.
텍사스의 톰 힉스 구단주가 당시 박찬호의 무시무시한 투구를 보고 반했던 것은 아닐까? 5년간 6천5백만 달러라는 엄청난 투자의 결정을 내린 데는 이 경기의 역투도 한몫했음직하다. 그리고 9월28일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박찬호는 밀워키를 상대로 6이닝 1실점해 시즌 15승 고지에 올랐다.
생애 최고의 해를 보낸 2000년에는 6월에 5연승, 8월에 4연승 등을 거두며 한 시즌 최다인 18승을 거뒀다. 그러나 기억서 지울 수 없는, 가장 아쉬웠던 경기가 있으니 9월10일의 콜롤라도 로키스전이다. 당시 박찬호는 15승8패를 거두고 있었고, 시즌 다섯 경기를 남긴 상태였다. 컨디션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어떤 팀과 붙어도 이길 자신에 넘쳤다. 그런데 다섯 경기가 남았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박찬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남은 다섯 게임에서 모두 승리하면 꿈의 승수인 ‘한 시즌 20승’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로키스전에서 5이닝 동안 5실점하며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다. 그 충격은 5일 뒤 로키스와의 재대결로까지 이어져 2연패를 당했다.
그러나 박찬호는 9월30일 벌어진 샌디에이고와의 원정 경기에서 9이닝 2안타에 삼진 13개를 잡으며 생애 첫 완봉승으로 시즌 18승째를 장식했다. 경기가 끝난 뒤 박찬호는 “시즌이 끝난 것이 너무 아쉽다”며 20승 고지에 오르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었다.
2001년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뛴 마지막 해에는 4월3일의 개막전 선발이라는 영예가 주어졌다. 박찬호는 밀워키를 상대로 7이닝 무실점의 완벽투로 승리를 장식했다.
2001년에도 15승을 거두며 뛰어난 시즌을 보낸 박찬호지만 10월6일에 벌어진 최종전에서는 배리 본즈에게 거푸 역사적인 홈런을 얻어맞기도 했다. 본즈가 타석에 들어서자 박찬호는 정면 승부를 펼쳤다.
그러나 당시 70홈런으로 마크 맥과이어의 한 시즌 최다 홈런과 타이를 이뤘던 본즈는 1회말 박찬호의 바깥쪽 투심 패스트볼을 노려 71호 홈런을 뽑아냈고, 4회에는 커브를 받아쳐 72호 홈런을 쳐냈다. 다저스 선발로 마지막 경기에서 아쉽게 승패를 기록하지 못하고 역사적인 홈런만 내준 박찬호는 4회에 강판됐는데, 분을 이기지 못하고 타석에서 썼던 헬멧을 팽개쳐 깨뜨리고 말았다. 통산 80승을 거두고 다저스 시대를 마감한 순간이었다.
2002년 텍사스로 이적한 후 3년간은 허리 부상에 시달리며 부진의 연속이었다. 2002년 5월13일 부상에서 복귀해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5이닝 무실점으로 승리한 것은 아메리칸리그 이적 후 처음이자 알링턴의 홈구장에서 거둔 첫 승리로 기억에 남을 정도다.
그러나 박찬호는 올 시즌 재기에 성공해 동양인 투수로는 일본의 노모 히데오에 이어 두 번째로 통산 100승 고지에 올랐다.
스포츠조선 야구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