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이적 후 손등부상으로 올 시즌 초반 제대로 뛰지 못한 박진만이 드디어 ‘시동’을 걸고 있다. 우승으로 만회하겠다는 그의 말에서 자신감이 엿보인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1위를 독주하는 팀이라 그런지 선수단 전체가 활기가 넘치고 여유가 있었다. 인터뷰하는 박진만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선수들이 없을 정도다.
배칠수(배): 이거, 박진만 선수의 인기가 장난 아닌데요?
박진만(박): (특유의 머쓱한 표정으로) 오랜만에 인터뷰해서 그런지 다들 관심을 표해 주네요(그때 또다시 한 선수가 “웬 인터뷰?”하며 아는 체를 하자, 박진만 왈, “나도 왜 날 인터뷰하는지 모르겠다”며 농담으로 화답한다).
배: 지난 3개월 동안 고생 많으셨죠?
박: 그렇죠 뭐. 오른 손등의 뼈에 금이 가는 바람에 재활훈련을 했어요. 그냥 금이 간 게 아니라 조그만 뼈들이 조각조각 깨져 다시 붙이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배: ‘밥값’ 못해 속앓이 좀 했겠어요.
박: 밥값이라. 하하. 마음 고생 무지 많았습니다. 많은 돈을 받고 현대에서 삼성으로 이적한 첫 시즌이었는데 그만 부상으로 뛰지를 못했으니까요.
배: 그래도 팀 성적은 좋았어요. 뭐, 박진만 선수 없어도 잘 굴러가던데요?
박: 팀 성적이 좋아서 훨씬 부담이 덜했어요. 삼성에 워낙 좋은 선수들이 많잖아요. 만약 팀이 어려운 상황이었다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저 없어도 잘 굴러가야죠. 누가 부상으로 빠진다고 해서 전력에 큰 공백이 생기면 어렵기만 하죠.
배: ‘쪼잔한’ 우리가 보기엔 조금 불안해 할 법도 하던데요? 대타로 나온 김재걸 선수가 워낙 좋았잖아요.
박: 솔직히 아주 ‘쪼금’ 불안했어요. 하하.
배: 참, 얼마전 <일요신문>에서 조진호 선수를 인터뷰했는데 이전 고등학교 시절 무슨 전국대회에서 박진만 선수한테 9회 역전 홈런을 맞았다고 회상한 기사를 읽었어요.
▲ 박진만 선수(오른쪽)와 배칠수. | ||
배: 원래 때린 사람보다 매맞은 사람이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 법이에요.
박: 졸업 연도가 아니라 아마도 1, 2학년 때였을 거예요. 그런데 조진호 선수는 잘 있나요? 요즘 많이 힘들었을 텐데.
배: 제가 직접 만난 게 아니고 옆에서 열심히 받아 적고 계시는 기자분이 만나신 거라. 나중에 따로 물어보시도록 하구요. 인천 토박이죠? 우리 집도 인천인데.
박: 아, 그러세요? 인천이 고향이에요.
배: 그런데 왜 나랑 안 걸리지? 아하, 나이 차이가 좀 나는 구먼(참고로 박진만 선수는 76년생이고, 배칠수씨는 70년생이다). 인천에서만 살다가 대구에서 ‘신접살림’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아요.
박: 대구 시민들이 워낙 야구 광팬들이 많아서 재밌기도 하고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제가 야구를 잘 하고 있을 때라면 삼성팬들의 관심과 사랑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을 거예요. 오자마자 팔에 깁스하고 밖에도 못 다닐 정도로 힘들게 지내다보니까 사람들 만나는 게 쉽진 않더라구요.
배: 그래도 박진만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언젠가는 야구장에서 좋은 모습 보여줄 거라고 기대했던 팬들이 훨씬 많았을 거예요.
박: 그럴까요? 하긴 요즘엔 식당가서 밥 시키면 알아보시고는 서비스도 팍팍 주세요. 야구 잘하면 대구는 살기 좋은 곳이에요.
배: 얼마전 어느 기사를 보니까 선동열 감독께서 박진만 선수에 대한 칭찬을 하셨던데요. 팀에 1점이 필요하면 꼭 1점을 만들어 내는 타자라면서.
박: 정말요? 3개월 동안 재활훈련을 병행하면서 많은 느낌들이 있었어요. 저한테 주어지는 한 타석이라도 결코 소홀히 넘기지 말자는 다짐도 했구요. 야구장 밖에 있다 보면 야구장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요. 이제 ‘밥값’ 해야죠. 지금까지 밥 축 낸 거 다 보충하고 넘칠 수 있도록 열심히 뛰어야죠. 삼성이 우승할 수 있도록. 하하.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하는데 배칠수씨 키가 박진만 선수보다 더 커 사진기자가 좀 낮춰달라고 주문했더니 배칠수씨, 가만 있을 리가 없다. “야, 이젠 내가 선수한테 키를 맞추네”라고 어깨에 힘을 주자, 박진만이 웃으면서 한 마디 덧붙인다. “몸이 엄청 울퉁불퉁해요. 선수들 만날 때마다 일부러 알통 만들어 오신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