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지성(왼쪽), 안정환. | ||
거의 비슷한 시기에 유럽으로 재도약을 시작한 두 사람은 그 과정만큼이나 현지 생활도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었다.
‘축구말고 할 게 없는’ 쪽은 안정환이었다. 도시 문명과는 거리가 먼 시골 ‘깡촌’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 차를 타고 10분만 다니면 메스의 구석구석을 다 보고도 시간이 남을 만큼 안정환은 자신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도전을 펼치고 있었다.
맨체스터와 메스. 영국과 프랑스를 돌며 박지성과 안정환을 취재했던 과정에서 만난 두 축구선수들의 각기 다른 축구 인생을 소개한다.
안정환은 평상시 말이 없는 편이지만 가까이서 얘기를 나누면 겉모습과는 달리 굉장히 소탈한 면모를 나타낸다. 반대로 평소 내성적인 성격의 박지성은 조용한 듯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당찬 모습을 내비친다. 프랑스어 외엔 대화가 안 되는 곳에서 통역한테 전적으로 의존하는 안정환과 완벽한 영어구사를 위해 통역 없이 팀훈련에 합류하는 박지성은 또 다른 색깔로 다가온다.
76년생인 안정환과 81년생의 박지성은 5년이란 세월의 간극이 있지만 2002월드컵 이후 한국대표팀의 끈끈한 동료이자 경쟁자로 성장했다. 일본과 네덜란드에서 각기 활약하다 거의 동시에 잉글랜드와 프랑스로 인생의 방향타를 튼 부분은 우연치곤 기묘한 우연이다.
지난 7월7일부터 맨체스터에서 박지성을 취재하고 프랑스로 넘어가 안정환을 만나본 소감은 한국축구의 성장을 현장에서 봤다는 뿌듯함이었다. 하지만 두 선수는 유럽무대를 밟았다는 1차 목표에서는 같았지만 다음 여정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박지성은 세계 프로축구 최고의 무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최고 클럽 중 하나인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을 입었다. 박지성은 “우선 팀에서 주전을 확보하는 일이 목표”라고 각오를 다졌다. 또한 리그에서도 주목받는 선수가 되는 일이 다음 목표라고 덧붙였다. 맨유에서 주전으로 뛴다는 사실은 현재 세계 축구계에서 인정을 받는다고 봐도 무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맨유 선수들은 스타였다. 그들의 그림자는 넓고 대단했다. 득점 기계 반 니스텔루이는 성격도 좋아 한국 취재진에게 ‘굿맨’으로 통했다. 또 85년생으로 보기에는 나이든 티가 나는 웨인 루니의 넓은 활동폭과 개인기는 박지성을 능가했다. 크리스티아노 호나우두의 화려한 개인기를 직접 볼 기회는 갖지 못했지만 넘어야할 경쟁자임에 분명하다. 왼발의 달인이라는 미드필더 라이언 긱스의 기량은 녹슬지 않았다. 이들은 현재 세계 축구계를 호령하는 스타들이다. 박지성이 맨유에서 성공한다면 세계 축구계에 이름을 떨치는 셈이다.
그러나 안정환은 사정이 좀 다르다. 프랑스리그는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 빅리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다. 리그에서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빅리그라는 산을 또 넘어야 진짜 세계적인 스타로 대접받는다. 안정환은 메스를 2006독일월드컵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안정환은 메스에 만족하지 않고 큰 꿈을 꾸고 있었다. 그 꿈은 돈과는 별개다.
안정환은 남들 버는 만큼 돈은 벌었다고 말한다. 사업 수완이 좋아 장모가 청담동에 퓨전 한식당 2호점을 냈을 정도로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안정환의 측근은 “안정환은 운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다들 아니라고 할 때 안정환은 한번 질러보는데 그 결과가 항상 좋았다는 것이다. 돈에 관해서도 그랬다. 월드컵 전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스포츠 브랜드인 푸마를 직접 찾아가 광고모델이 된 얘기는 유명하다. 나이키와 모델 계약이 끝나자 마케팅 매니저에게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푸마를 한번 해보자”고 먼저 제안했단다.
그러나 안정환의 축구인생에서 실수는 있었다. 팬들의 지적처럼 2002월드컵 뒤 안정환은 유럽에 남았어야 했다. 2002월드컵 뒤 한국축구 선수 중 안정환이 가장 잘나갈 것이라는 얘기에 이의를 단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안정환은 일본에서 중요한 시기인 20대 후반을 보냈다. 돈은 벌었을지 몰라도 안정환이 추구하는 축구선수로서의 꿈은 멀어져 갔다.
하지만 안정환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란 진리를 믿으려 한다. 그는 “돈을 더 벌려고 했으면 프랑스로 오지 않고 일본이나 K리그로 복귀했을 것”이라며 메스행의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그의 꿈은 빅리그다. 특히 후배인 박지성의 잉글랜드행은 좋은 자극제가 됐다. 더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박지성을 보고 안정환의 자존심이 되살아났다. 그렇다고 안정환이 박지성을 시샘하는 것은 아니다. 안정환은 인정하는 후배와 인정하지 않는 후배가 극명하다. 박지성은 전자다.
하지만 안정환의 속마음은 그렇게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안정환은 한국축구의 희망으로 불리는 박주영에 대해 물어보자 “같은 또래였다면 질투도 느꼈을 것”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인기라면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누려 봤고 인기의 덧없음도 알고 있다며 인기에 대해 초월한 듯한 답변을 내놓았다. ‘꽃미남’에다 축구까지 잘 했으니 어찌보면 안정환의 20대는 인기에 파묻힌 세월이었다. 하지만 인기는 돌고 도는 법. 안정환은 “인기 정상에서 그대로 추락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인생은 자신과의 영원한 싸움이란 사실을 알았다”고 털어놨다. 인기의 덧없음과 또 인기에 목맸던 시간을 관조하는 여유가 생긴 그는 비교적 차분해 보였다.
박지성과 안정환은 새로운 환경에서 약간 긴장한 듯했다. 그러나 안정환과 박지성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안정환의 노련함과 박지성의 투박한 성실함이 그들의 꿈을 실현시켜 주길 빌어본다.
맨체스터·메스=변현명 스포츠투데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