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인식 한화 감독. 사진=임준선 기자kjlim@ilyo.co.kr | ||
이미 만방에 소문이 난 조성민의 눈물겨운 1승과 한화의 상승세, 어느 팀보다 활기차 보이는 팀 분위기, 쓸모없어 보였던 선수들과 나이 먹어 힘들겠다고 관심 밖에 머물던 선수들을 재기시켜 ‘밥벌이’하게끔 만드는 탁월한 지도력 등 김 감독한테는 참으로 많은 사연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더욱이 지난해 뇌경색으로 쓰러져 팔 다리가 마비됐음에도 불구하고 짧고 굵은 재활운동을 통해 현장에 다시 복귀한 과정들은 ‘인간 승리’나 다름없다.
‘리얼토크’답게 감독 김인식보다는 감독의 굴레를 벗어난 김인식을 만나고 싶다고 주문을 했더니 김 감독 특유의 ‘흐흐’ 웃음 소리가 흘러나오며 어느새 ‘친절한 감독님’이 돼 있었다.
술…친구에서 적으로
뇌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만 해도 김 감독한테 술은 ‘친구’였다. 술의 존재는 그의 타고난 친화력을 강한 흡인력으로 변화시켰고 한번 만난 사람도 그를 좋아하게 만드는 ‘신기의 묘약’이나 마찬가지였다.
“난 독주를 좋아했어. 물론 처음에는 맥주로 술을 배웠지. 그러다 동국대 감독하면서부터 독주를 마시게 됐어. 맥주보단 소주가 훨씬 편하더라구. 그러다 두산 막바지부터 독주가 싫어지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봐. 사실 맥주는 지금도 싫어. 하지만 몸이 이러니까 어쩌다 맥주 한 캔씩은 들이키지.”
김 감독은 두산 시절 잘 가는 아지트가 있었다. 특히 잠원동 부근의 ‘처가집’은 아지트 중의 아지트였다. 그와 자주 술자리를 함께 했던 지인들은 별다른 약속을 하지 않아도 경기 후 ‘처가집’에 가면 김 감독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 기자는 김 감독이 ‘처가집’을 자주 간다는 주위 사람들의 설명에 실제로 김 감독의 처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그 곳이 호프를 파는 치킨집 상호명인 걸 알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 얘기를 했더니 김 감독이 이렇게 말한다.
“흐흐. 술 좋아하던 시절의 일화지 뭐. 지금은 그런 낙이 없어. 술 대신 텔레비전이 내 친구가 됐지. 숙소에 일찍 들어가면 뭐 할 일이 있겠어. 그저 리모컨 들고 채널 돌려가며 구경하는 게 유일한 취미 생활이지.”
감독의 그늘, 외로움
흔히 지도자는 외로운 자리라고들 얘기한다.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나서 대답을 유도하려고 하니까 나이 많은 감독한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젊은 감독이나 외로움을 타지 나야 뭐 이미 다 겪었으니까. 센치한 면이 없어졌어. 쌍방울 때가 좀 힘들었어. 아무래도 지는 경기가 많았으니까. 그때 내 나이가 마흔넷이었거든. 옷도 안 벗고 유니폼을 입은 채로 소파에 앉아서 생각에 빠지다보면 어느새 아침이야. 그날 경기를 복기하다보니까 시간 가는 줄을 모른 거지. 아무도 없는 숙소에서 혼자 소주잔 기울이며 패인을 분석하다가 아침을 맞을 때, 이럴 때 정말 외롭더라구.”
김 감독은 팀 순위 1위를 달리고 있는 후배 선동열 감독이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대구에서 지내면서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걱정을 했다.
“강팀을 맡아서 그렇지 선 감독도 겉으론 안 그런 척해도 엄청 스트레스 받았을 거야. 삼성이 1위를 못하면 안 되는 상황에서 그 자리 지키려면 얼마나 힘들었겠어. 힘들고 외로운 거라구. 초보 감독이라 더 절절히 느꼈을걸?”
▲ 지난 5월 한화에 입단한 조성민과 악수하는 김인식 감독. 사진제공=한화이글스 | ||
김 감독이 두산에서 물러난 가장 큰 이유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선동열 감독 때문이었다. 당시 KBO 총재이자 두산의 구단주였던 박용오 총재가 오래 전부터 선동열 감독을 두산으로 데려와 키우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고 재계약 기간이 끝나는 2003년을 김 감독은 자신이 두산에서 보내는 마지막 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에서야 얘기하지만 선동열 감독을 두산으로 데려오려 했던 건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었다구. 몇 해 전부터 총재가 ‘감독, 선동열을 한번 키워보자’고 주문했고 나도 찬성을 한 거니까. 그때 총재는 선동열이 감독을 맡으면 나한테 따로 시킬 일이 있다고 했지. 2003년 5월에 구단에서 부사장 제의가 있었어. 선동열을 감독으로 데려오면 날 부사장에 앉히겠다는 계획이었던 거야. 그런데 막상 시즌이 끝날 때쯤 되니까 내가 물러나면 같이 옷을 벗어야 할 코치가 대여섯명 정도 되더라구. 그게 암담했지. 난 부사장에 앉고 나랑 같이 고생했던 코치들은 직장을 잃는다? 말이 안 되는 거였어. 그래서 아예 나도 사표를 쓰고 나와 버린 거야.”
정리를 해본다면 김 감독은 2003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 해가 마지막 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자신의 후임으로 선동열 감독이 바통을 이어받을 것임을 다 예상했다는 것이다. 결국 선동열 감독이 막판에 모든 사람의 예상을 깨고 삼성으로 방향을 틀기는 했지만 김 감독은 후배한테 길을 열어주기 위함보다는 한배를 탔던 코치들과 똑같이 백수 생활을 하려고 두산과의 인연을 정리한 것이다.
김 감독은 선동열 감독의 삼성행에 대해 이런 해석을 곁들였다.
“그때의 일에 대해선 누구의 잘못을 탓할 수가 없어. 총재는 총재대로 선동열을 홍보위원 만들어 놓고 그 사람의 앞길을 걱정했기 때문에 다른 팀보다는 두산으로 데려오려 했던 거였으니까. 물론 선동열 정도면 그냥 놔둬도 잘 헤쳐 갈 사람이지만 말이야.”
김 감독은 사령탑에서 물러난 후 KBO 육성위원회로 활동하며 경기장 밖에서 머물렀다. 그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감독 그만두고 KBO 일하면서 보냈는데 가장 당황했던 때가 전지훈련 기간이었어. 나랑 같이 시간을 보냈던 허구연(MBC 해설위원)은 미국 간다고 떠나고 김광철(SBS 해설위원)은 방송 자료 조사차 하와이로 가더라구. 백수였던 난 그냥 집에 있었지. 그땐 정말 기분이 착잡하대.”
▲ 지난 2001년 두산 감독으로 한국시리즈 우승 후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고 있다. | ||
지난 8월15일 깜짝 등판해 재기 무대를 1승으로 채운 조성민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당시 김 감독은 모든 신문에서 ‘광복 특사’ ‘광복투’ 운운하며 1면 톱기사로 조성민을 다루자 ‘걔가 무슨 독립 운동한 애냐’며 기분 좋은 ‘딴지’를 걸기도 했었다. 조성민의 등장으로 취재진들이 북적이면서 인기와 스포트라이트와는 별로 연관이 없던 구단이 취재진들로 들썩이자 김 감독으로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거나 다름없었다.
“16일 아침 신문 보고 나도 깜짝 놀랐어. 모든 매스컴이 조성민 얘기만 하더라구. 우리가 몇 승 해봐. 기사가 그렇게 대문짝만하게 나나. 그게 바로 스타플레이어의 힘이지. 조성민을 영입하면서 내가 원했던 부분 중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구. 관심을 모으는 것. 기사거리를 만들어내는 것. 그걸 노렸던 거야.”
예상보다 보름 정도 빨리 1군 무대에 오른 조성민에 대한 김 감독의 기대는 ‘아직’이었다.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라는 것.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고려대 전지훈련 때 사이판에서 조성민을 한 달간 지켜봤었어. 그게 조성민을 영입하는 판단의 잣대가 되긴 했지. 더욱이 제일 화려하게 운동 생활을 했어야 할 선수가 그렇게 가보지도 못하고 접는다는 건 너무 아깝잖아. 그래서 시작한 건데. 몰라. 두고 봐야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서서히 나아지는 건 틀림없으니까.”
김 감독과 조성민의 아버지 조주형씨는 한일은행 시절 야구선수와 연식정구 선수로 인연을 맺은 사이다. 물론 그 관계가 조성민이 한화에 입단하게 된 계기는 결코 아니다. 그래도 친구의 아들을 보는 김 감독의 마음은 조금 남다를 것 같았지만 그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재활공장장이라고?
김 감독의 별명은 그 유명한 ‘재활공장장’이다. 쓸모없어진 선수, 다른 팀에서 전혀 관심 두지 않는 선수를 데려다가 ‘쓸모 있는 선수’로 바꾸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비단 한화에서뿐만 아니라 쌍방울, 두산에서도 그의 이런 장기는 빛을 발해 왔다. 이런 대중적인 평가에 대해 김 감독은 손사래를 친다.
“선수들 운이 좋았던 거지. 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선수를 보는 눈은 비슷할 거야. 나나 다른 팀 감독도. 그런데 오랫동안 지도자 생활을 해보니까 이젠 이기고 성적내는 데에만 얽매이기보다는 인간적으로 선수가 살 수 있게끔 해주는 게 남는 거더라구. 직장 잃은 사람, 잃지 않게 만드는 것도 감독의 몫이니까. 그렇다고 모든 선수들을 다 끌어 안고 갈 수는 없지만 제 기량을 다 펼치지 못하는 선수가 자의 반 타의 반 그만 두게 되면 한이 되거든. 그건 풀고 가게 해줘야지.”
김 감독은 요즘 정상적인 마운드 운영이 힘들어진 상황에서도 투수를 아끼려고 무지 노력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욕심 같아선 이 선수, 저 선수, 이길 수 있는 경기라면 몸 상태 생각하지 않고 죄다 올려 세우고 싶지만 선수의 장래를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프로야구 가을 잔치를 집이 아닌 야구장에서 보내게 될 한화 선수단을 이끌고 있는 김 감독은 플레이오프 운영에 대해 물어 보면 할 말이 없다고 한다. 이유는 한 가지. ‘지금 당장 눈 앞에 펼쳐진 경기를 요리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이다.
인터뷰 말미에 김 감독이 특유의 ‘썰렁한 체험 유머’를 털어 놓았다.
“이 기자, 내가 말이야 한창 때는 새벽까지 술을 마셔도 그 시간이 아주 잠깐이었거든. 술 몇 잔 마시고 얘기하다 노래 한 곡 부르면 새벽이 그냥 지나갔지. 그런데 술 안 마시고 술자리에 있는 건 보통 고역이 아니야. 아니, 1시간도 버티기 힘들더라구. 흐흐흐.”
절친했던 친구 ‘술’과 이별한 김 감독은 오늘도 경기가 끝나면 TV 리모컨을 벗 삼아 야구를 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가 주로 보는 채널은 연속극이 아닌 야구 중계하는 스포츠 채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