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25일 한나라당 서울시장후보선출대회에서 오세훈 예비후보가 포효하고 있다.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하지만 ‘민심’이 ‘당심’을 누른 이번 경선 결과는 스스로 당 체질 개선을 할 수 없다는 한나라당의 한계를 그대로 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개혁 강요는 당내 역학 구도는 물론 장기적으로는 대권 구도에까지도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일반적으로 ‘친이(명박)’로 분류되는 오 전 의원이 ‘친박(근혜)’ 맹 후보를 눌렀다는 점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이 대권으로 가는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오 전 의원의 당선으로 ‘외부로부터의 힘’을 확인한 소장파가 제3의 후보를 전격 영입해 ‘이명박-박근혜’의 양강 대권 구도에 근본적 변화를 시도할 가능성도 크다.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과 대권 구도 사이에 놓인 기묘한 ‘이차방정식’을 풀어보았다.
한나라당 서울시장 경선이 열리기 일주일 전 서울의 한 당원협의회(옛 지구당) 사무실. 오세훈 예비후보가 전격적인 출마 결정을 하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지역구 순방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은 9명의 지역 후보들은 오 전 의원이 온다는 소식에 전원 사무실에서 대기하며 들뜬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다. 오 예비후보가 도착하자 모두들 사진 촬영을 하는 등 눈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은 맹형규 예비후보의 순방이 예정돼 있었다. 맹 예비후보는 오랫동안 이 지역구를 ‘관리’했기 때문에 이곳은 분명히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적어도 오 전 의원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전날 공천자 전원이 참석했던 것과는 달리 이날은 9명 공천자 가운데 3~4명은 ‘지각’을 했고 1명은 아예 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 다음 날은 홍준표 예비후보의 방문이 있었다. 이때는 맹 예비후보 방문 때보다도 참석률이 더 저조했다고 한다.
이 지역구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3일 동안 예비후보들의 방문을 받으면서 당의 밑바닥에서부터 ‘오풍’이 불고 있음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당비 미납 등 문제가 있었지만 경선 일주일 전쯤부터는 오 예비후보 쪽으로 분위기가 잡혔던 것 같다. 이번에 공천을 받은 기초단체 후보자들은 본선에서 확실하게 당선될 서울시장 후보를 전략적으로 선택하기 때문에 오 전 의원 바람이 막판에 확 몰아쳤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른바 ‘오풍’이 부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이들은 바로 한나라당 소장파들이다. 소장파는 먼저 ‘민심’을 등에 업고 오 전 의원의 극적인 영입을 이끌어냈다. 또한 소장파 의원들은 이번 경선 과정에서도 원외 운영위원장들에게 ‘자유투표’를 적극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 후보가 ‘당심’에서도 맹형규 예비후보에 100여 표밖에 뒤지지 않았던 비결이기도 했다. 오 후보의 극적인 당선은 곧 소장파 의원들의 당내 입지 강화로 연결되고 있다.
이 같은 소장파의 급부상은 당내 역학 구도에 근본적 변화를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먼저 당권을 위주로 풀어보자. 소장파는 오는 7월 전당대회에서 개혁노선에 동조하는 당내 의원들을 최고위원으로 입성시킨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오풍’을 발판으로 독자적 세 규합에 나선다는 것이다.
소장파는 다른 정파와의 전략적 연대도 적극 모색하고 있다. 7월 전당대회를 통해 구성될 지도체제는 2007년 대권경쟁을 관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이런 점 때문에 소장파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지난 1월 원내대표 경선에서 세를 과시한 바 있는 ‘국가발전연구회’(발전연) 모임과의 연대를 다시 한번 추진 중이다. 이재오 원내대표와 남경필 의원이 이 연대를 통해 각각 당대표와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할 것으로 예상된다.
▲ 박근혜 대표(왼쪽), 이명박 시장. | ||
소장파 리더격인 원희룡 의원은 이에 대해 “정당은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검증 받는다. 당내에서도 시대의 흐름과 동떨어지는 일들과 안이한 행동들은 앞으로 힘이 많이 약해질 것이다. 전당대회를 통해 국민들의 요구들을 훨씬 더 개방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며 전당대회에 대한 자신감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오풍’을 통해 단번에 정치적 거물이 되어버린 오세훈 전 의원 자체도 대권 구도에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서울시장 자리는 여야를 막론하고 차기 대선 주자 1순위에 꼽힐 만큼 정치적인 비중이 큰 자리다. 오 전 의원이 서울시장에 당선될 경우 박근혜 대표,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도지사와 함께 잠재적 대권주자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당의 한 관계자는 “오 후보가 아직은 아무런 세가 없지만 서울시장이 되면 위치가 달라져 대선주자들이 반드시 자기 진영으로 영입해야 할 대상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즉 ‘오풍’이 대권 구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얘기다.
소장파와 힘을 합한 ‘오풍’은 지금까지의 ‘박근혜-이명박’ 양강 대권 구도를 3강 또는 다각 체제로 만들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 인한 향후 대권 구도는 ‘박근혜-흐림, 이명박-맑음, 손학규-점점 맑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박 대표의 경우 ‘오풍’이 달가울 리 없다. 무엇보다 그동안 소장파와의 감정 대립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한나라당 수도권의 한 의원은 “소장파와 박근혜 대표와의 관계는 지난해 말 원희룡 의원과 박 대표의 ‘이념병’ 논쟁 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소장파가 ‘오풍’을 일으켰기 때문에 향후 대권주자로서의 박 대표 입지도 더욱 약화될 것이다. 무엇보다 양측의 화해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진다는 점이 박 대표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할 것으로 본다”라고 밝혔다.
이 같은 소장파의 약진은 ‘반박세력’을 대변하는 이명박 시장의 당내 입지 강화로 연결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 시장은 이번 경선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오 후보의 경선 참여를 내심 바랐던 만큼 소장파와의 연대 가능성도 더욱 높였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소장파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또한 “박 대표가 앞으로도 유신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집착한다면 소장파와의 연대도 그만큼 어렵다고 본다. 반면 이명박 시장의 경우 본인은 보수적 색채가 강하지만 소장파의 개혁적인 정책을 받아들인다면 국민들로부터 ‘개혁 성향의 보수주의자’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소장파로서는 이 시장과의 연대가 정치적으로 더 매력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시장의 최측근 정태근 정무부시장도 소장파의 ‘고향’격인 ‘미래연대’ 출신이라는 점에서 양측의 연대감은 더욱 깊은 게 사실이다. 여기에 경선과정에서 오 후보의 ‘선대본부장’ 역할을 톡톡히 한 박계동 의원 역시 이 시장의 측근이다.
이 시장이 서울시장 경선에 직접 개입치는 않았어도 이 시장 측이 오 후보의 영입에 관심을 쏟았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까닭에 서울시장 후보 경선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오 후보를 지원해 당선시켰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 원희룡 의원 | ||
마지막으로 손학규 경기도지사도 ‘오풍’ 때문에 ‘흐림’에서 ‘점점 맑음’의 기상도로 옮겨갈 것으로 보인다. 손 지사는 최근 영어마을 성공과 파주 LCD 공장 준공 등을 계기로 1%대를 오가던 지지율이 4월 들어 3%를 넘어서는 등 서서히 대권주자로서 강렬한 인상을 국민들에게 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장파의 오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하자 손 지사도 상당히 고무돼 있다. 손 지사는 평소 소장파의 ‘튀는’ 행보에 대해서도 “당내에는 다양한 의견이 필요하다”며 감싸는 모습을 보이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번 ‘오풍’으로 인해 손 지사의 지지율도 한층 힘을 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하지만 정가에서는 ‘오풍’이 기존 대권 주자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다. 이번 경선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오세훈 돌풍’은 한나라당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경선에서 보여준 당원들의 ‘전략전 선택’은 더 이상 될 만한 후보를 뽑는 ‘이중적’ 잣대가 아니다. 이는 자기 스스로 체질 개선을 할 수 없는 한나라당이 국민들의 개혁 요구에 ‘무장해제’당한 것이다. 당원들도 결국 ‘민심’을 따랐다는 것이다. 이런 당 안팎의 흐름은 기존 대권 구도를 송두리째 바꿀 폭풍의 핵으로 다가오고 있다.
원희룡 의원은 최근 기자에게 “향후 당권, 대권 구도에서 ‘발칙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싶다. 꼭 당내 인사만 유력한 대권주자로 올라설 이유가 없지 않느냐. 외부에서도 얼마든지 유력한 주자들이 많다. 파격적 인사 영입을 위해 발 벗고 나서겠다. 7월 전당대회에서 좋은 인사가 있으면 관리형 대표로 영입할 수 있고 대권도 마찬가지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실제로 당 일각에서는 관리형 대표에 적합한 외부 인사로 윤여준, 박세일 전 의원과 학계 명망가 등이 거명되고 있다. 또한 대권과 관련해서도 박근혜-이명박 양강 구도를 넘어서는 제3의 후보를 찾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오세훈 돌풍을 보면서 정치인의 브랜드 시대가 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들은 기존 브랜드에 식상해하고 있다. 이제 기존 대권주자들은 더욱 긴장해야 할 것이다. 유력하다는 말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앞으로 제2, 제3의 오세훈 돌풍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밝혔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