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축구협회는 쏟아져 들어오는 감독 후보들에 대한 이력서로 정신이 없다. 월드컵 본선진출권을 이미 따낸 한국 대표팀 감독직은 ‘독이 든 성배’로 표현될 만큼 감독들의 무덤으로 불리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다. 연봉도 만만치 않고(약 1백만달러·10억원) 2006독일월드컵 본선에도 나가니 놀고 있는 감독들한테는 군침을 돌게 할 수 있는 자리다.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감독들의 이름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려지고 있지만 축구협회는 오히려 골머리를 앓고 있다. 명장을 데리고 오자니 대우가 문제고 어설픈 인사를 뽑으면 여론의 질타를 받을 상황이다. 못한다고 감독을 일단 잘랐지만 ‘구관이 명관’이란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참신하고 모두 고개를 끄덕일 만한 감독을 골라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다.
축구협회에서 감독에 대한 이력서를 취합하는 곳은 대외협력국이다. 이전에 국제국으로 불렸던 이 곳은 국제축구연맹(FIFA)을 비롯해 해외 축구협회와 교류를 총괄한다. 또 A매치를 진행하고 특히 감독 후보들에 대한 정보를 모은다. 감독 후보들도 이력서를 대외협렵국으로 제출하는데 에이전트들이 후보들의 일을 대행한다.
하지만 최근 신문의 축구지면을 장식하는 후보들 중에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 대표팀 감독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에이전트 A씨는 “감독을 데려올 경우 수수료 등 금전적인 혜택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그보다 한국 축구계에서 우뚝 설 수 있다는 점이 더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즉 대표팀 감독을 보유하고 있는 능력있는 에이전시라는 얘기를 듣기 위해 감독들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일단 이력서를 대한축구협회에 내보는 것이다. 협회에서 관심이 있다고 하면 그때 감독 후보에게 연락해도 늦지 않다는 판단이다.
축구협회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신문에 나온 감독 후보들도 전화를 걸어보면 “공식적인 제안은 없었다”는 다소 황당한 반응을 듣게 된다. 에이전트들의 상술에 언론이 놀아나고 있는 현실이다.
에이전트들이 후보를 국민들에게 알리는 대표적인 방법은 언론을 이용하는 것이다. 에이전트들은 기자들에게 “이 후보에 대해 축구협회에서 긍정적으로 평가중”이라고 말을 흘리고 언론은 이를 지면과 방송을 통해 그대로 보도한다. TV를 통해 감독 후보와 인터뷰를 할 수 있다면 최고의 홍보효과를 거두게 된다.
이런 가운데 어떤 에이전트는 언론에 인터뷰를 주선하면서까지 자신이 밀고 있는 후보에 대한 인지도를 높인다고 한다.
축구협회 고위관계자 B씨는 “요즘에는 언론에서 후보들을 매일 내놓고 팬들은 인터넷상에서 평가하는 모습”이라며 “특정 언론에서 특정 후보를 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축구협회 대외협력국의 가삼현 국장은 “본프레레 감독 사퇴 이전부터 이력서를 내는 에이전트들이 있어서 혼을 내줬다”고 밝혔다. 본프레레 감독의 경질 위기 얘기가 나오자마자 에이전트들은 차기 감독직을 선점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축구협회 한 관계자는 “세계에서 그래도 감독으로 이름깨나 알려졌다는 인사들 중 웬만한 감독들은 한국 감독 후보에 응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본인도 모르게 이력서가 축구협회 사무실에 쌓이고 있는 것은 분명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쿠엘류 감독 경질 이후 축구협회는 에이전트들의 추천과 자체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 좁혀진 감독 후보를 언론에 미리 발표하는 실수를 범했다. 투명한 선임이 이유였지만 혼란만 가중됐고 결국 후보에도 들지 못했던 본프레레를 급작스럽게 데려와 1년2개월 만에 내쫓고 말았다.
과거의 이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철저한 비공개 원칙으로 감독을 뽑고 있지만 에이전트들과 언론의 보도 경쟁으로 인해 또다른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이 과정에 국내 지도자들의 불만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축구협회 산하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C씨는 “왜 외국인 감독들만 거론되는가. 학연이나 지연으로 인해 한국인 감독을 피한다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항의했다.
그는 “1986멕시코, 1990이탈리아, 1994미국, 1998프랑스 월드컵 때는 한국인 감독이었다”면서 히딩크 감독의 성공으로 인해 한국인 감독들의 입지가 떨어졌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한국인 감독들은 마치 무능하고 부패한 것처럼 비치는 것 같아 이번에는 한국인을 월드컵 감독으로 뽑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다른 국내지도자 D씨는 “축구협회 수뇌부의 이미지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비난의 강도를 더했다. 그는 “본프레레 경질 뒤 자리를 굳건히 지키면서 비판을 무시하고 있는 기술위가 국내 감독론에 대해 목소리를 낼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는 지난 2일 차기 국가대표 감독 최종후보로 한국인 지도자를 배제한 외국인 지도자 7명으로 압축했다고 발표했다.
변현명 스포츠투데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