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호, 서재응, 김병현(왼쪽부터). | ||
국내 프로야구를 취재할 당시 만나던 장성호와 정수근의 쾌활한 성격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 잔걱정 없는 스타일이라 그라운드에선 언제나 씩씩하고 활기차게 야구에 몰두하는 스타일. 홍성흔이 농담처럼 던진 이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선수 개개인마다 가진 성격과 품성은 때론 그라운드 위에서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이 공식은 최상급 무대라는 메이저리그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 선수들에게도 적용된다. 현지에서 인터뷰를 하며 파악해본 코리안 메이저리거들의 성격. 이는 과연 플레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박찬호(32·샌디에이고)
미국인들이 이력서의 자기소개란에 빠뜨리지 않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잘 정돈된 사람(well organized person)’이다. 정확한 계획 하에 A부터 Z까지 빠짐없는 일처리를 해나가는 사람을 가르키는 말. 미국 야구 ‘개척자’ 박찬호는 바로 이런 부류에 가깝다.
목표를 세우면 무서운 집념을 가지고 노력하는 스타일. 주위 어느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황무지 같은 마이너 생활을 견뎌내고 한때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건 이런 성격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내리막 나이에 허리 부상으로 인한 3년간의 공백을 딛고 올 시즌 재기를 해낼 수 있었던 기적도 그의 집념 없인 설명하기 힘들다(실제 빅리그에서 3년간 부진했던 투수가 두 자리 승수 투수로 복귀하는 경우는 불과 10%도 안됨).
경기 당일 박찬호는 무척 예민해진다. 선발 등판 전 그라운드나 클럽하우스에서 박찬호는 취재에 응하지 않는다. 경기에 맞춰 최대한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예민함은 박찬호에게 때론 도움이 되기도 하고, 때론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된다. 전성기 때 박찬호는 일단 한번 제 페이스를 찾으면 그야말로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언히터블’이었다. 하지만, 미묘한 경기 상황(역전을 시켰다거나, 천적을 만났다거나)에 따라 기복을 보이기도 했다. 주위 상황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편이다.
서재응(28·뉴욕 메츠)
서재응의 성격은 예민하다는 투수치곤 매우 활달한 편이다. 인터뷰를 할 때도 주저 없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한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질문의 요지를 벗어나지 않고 핵심만 간추리는 능력은 비상한 두뇌를 짐작케 한다.
실생활에서도 서재응은 특유의 리더십으로 인해 주위에 야구 선후배가 끊이지 않는 스타일. 서재응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인하대 시절 의기가 투합하면 밤새워 소주잔을 기울일 줄 아는 의리파’로 그를 기억한다. 그렇다보니 서재응은 좋고 나쁨이 분명하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것’이다. 얼굴과 말에 티가 나니 숨길 수도 없다.
지난해 초 뉴욕 메츠 릭 페터슨 투수코치와의 갈등은 서재응의 이러한 성격도 한몫을 했다. 투구폼 교정 문제로 갈등이 시작될 무렵, 서재응은 국내 언론을 통해 페터슨 코치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했고 이는 우여곡절 끝에 페터슨 코치의 귀에 들어갔다. 메츠에서 서재응의 고행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된 셈. 올초 스프링캠프서 만난 서재응은 ‘코치와의 불화 때문에 시즌 시작과 동시에 마이너행이 유력하지 않느냐’고 묻자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신경쓰지 않는다. 마이너로 보내도 열심히 해서 기회를 잡으면 된다”고 말했다.
현재도 메츠 투수코치는 페터슨이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서재응은 마운드 위에서 위기가 닥쳐도 정면 돌파를 택하는 스타일이다. 최근 서재응 선발 경기에선 결정적 실점 상황에서 멋지게 탈출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갈고 닦은 구위에 대한 자신감이 정면돌파로 이어지는 셈이다.
김병현(26·콜로라도)
김병현은 경기 후 클럽하우스로 인터뷰를 가면 가장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코리안 메이저리거다. 이유는 바로 웨이트 트레이닝. 씻고 바로 나와 옷을 갈아입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김병현은 경기 후 야식 먹듯 개인훈련을 거르지 않는다.
그야말로 야구만 생각하며 꾸준히 운동하는 스타일. 잘 알려진 바대로 그의 일상사는 심플하다. ‘운동 아니면 잠’이라고 김병현을 규정한 말은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워낙 제 할 일만 하는 스타일이다보니 현지 언론과 일부 팀 동료로부터 ‘이기적’이란 불필요한 오해도 받았다.
김병현은 인터뷰도 장광설은 질색이다. 쓸 말이 없을 정도로 짧게 줄여 대답하지만 적어도 가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평소 조용한 김병현이지만 결코 순한 성격은 아니다. 특히 마운드에 서면 투사로 돌변한다. 강한 승부욕을 보이며 경우에 따라 빈볼도 서슴없이 찔러 넣는다. 김병현의 심플한 생활과 사고방식은 마운드 위에서 큰 장점이 된다. 홍성흔이 얘기했던 바로 그 장점을 김병현이 지닌 셈이다.
최희섭(26·LA다저스)
다저스타디움 클럽하우스에서 인터뷰를 위해 최희섭을 기다리다 보면 한 30cm는 될 듯한 커다란 검정색 구두 한 켤레가 눈에 띈다. 한동안 관찰한 결과 이 구두는 좀처럼 다른 구두로 바뀌지 않았다. 최희섭은 그야말로 소박한 청년이다. 총각임에도 머리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대충 말리고 돌아선다. 그 흔한 향수조차 뿌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오직 야구만 생각하는 성실파 중 하나.
최희섭은 우스갯소리로 ‘로댕’과다. 로댕의 조각품 ‘생각하는 사람’을 빗댄 말. 스스로 인정하듯 타석에서 생각이 많은 편이다. 이유는 바로 의욕 때문이다. 주전과 후보의 경계선상에서 생활해온 그는 성공에 대한 집념과 노력을 동시에 쏟아붓고 있다. 한정된 기회에 서다보니 자연히 의욕이 넘친다. 이는 바로 타석에서의 불필요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최근 선발출전이 뜸한 최희섭은 “요즘은 생각 많이 안하고 치려고 한다”고 말한다.
듬직한 청년 최희섭을 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대기만성형’ 선수의 전형이란 생각이 든다. 모래보다는 물같이 ‘천천히 달아오르고 천천히 식는’ 선수가 바로 ‘빅초이’다.
정현석 스포츠조선 미국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