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박찬호, 서재응, 김선우, 김병헌 | ||
재기에 성공하며 다시 부활한 ‘맏형’ 박찬호(32·샌디에고)부터 풀타임을 소화하며 차세대 거포 자리를 예약하고 있는 ‘막내’ 최희섭(26·LA 다저스)까지 올해 코리언 메이저리거들은 저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둬들이고 있는 중이다.
민족 최대의 명절 한가위. 해외에서 마지막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뛰는 선수들을 대신해서 선수들의 고향을 찾아 옛 은사들과 모교의 동기 선후배들로부터 그들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천하장사 박찬호
먼저 찾아간 곳은 ‘꿈의 무대’를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어 준 박찬호의 모교 공주고. 현재 공주고에는 공주 중동 초등학교 때부터 한양대학교까지 유년 시절의 야구를 모두 함께한 오중석씨(32)가 코치로 부임해서 후배들을 지도중이다. 운 좋게도 오중석 코치와 공주고 관계자 들을 통해서 박찬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눈썹 진한 놈 치고 힘 못 쓰는 놈 봤어? 찬호 그놈 눈썹 좀 봐!”
박찬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타고난 장사였다. 그리 큰 체구는 아니었지만 또래 중에 박찬호에게 팔씨름을 이기는 아이는 없었다고. 한 번은 친구들과 사소한 말다툼이 육탄전(?)으로 커진 적이 있었는데 당시 팔이 부러져 깁스를 한 박찬호는 깁스를 한 왼팔로도 상대방을 완전히 제압할 정도로 힘에 관한 한 선천적으로 타고났다는 것이 그를 지켜본 사람들의 평가다.
타고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박찬호지만 그의 불만은 호리호리(?)한 몸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의 고등학교 때의 체구는 야구선수들 평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더 큰 선수로 성장하기 위해 몸집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박찬호는 그 길로 헬스클럽을 찾아가 웨이트 트레이닝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투수들의 유연성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웨이트 트레이닝이 금기시되는 분위기였지만 박찬호는 오히려 웨이트를 통한 몸집 불리기에 목을 맨 것.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팔굽혀펴기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단다. 하지만 문제는 음식 조절. 몸집 늘리는 가장 빠른 방법이 날계란 먹기라는 관장의 말에 무려 한 달이 넘도록 시도 때도 없이 날계란을 먹는 집념(?)을 보였을 정도다. ‘계란 파워’로 유명한 심정수(30·삼성)보다도 ‘원조 계란 파워맨’인 셈.
박찬호는 이처럼 부족한 점을 발견할 시에는 최대한의 노력을 통해 보안하는 ‘성실맨’ 그 자체였다. 오중석 코치는 “노력하는 천재였어요. 자부심, 자신감, 승부욕, 자기관리 뭐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던 것 같아요”라며 친구 박찬호를 회상했다.
‘천재’ 박찬호였지만 어린 시절에는 여느 또래와 마찬가지였다. 전파상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친구들과 몰래 타고나가다 망가뜨려 야단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정도로 개구쟁이였다.
또 친구들 사이에서 ‘건망증’ 하면 박찬호를 떠올릴 정도로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아이였다. 통장과 도장을 너무 자주 잃어버려서 자신만 아는 곳에 잘 보관해 두었는데 그만 그 보관 장소마저 잊어버려 통장을 다시 재발급 받을 정도로 ‘까먹기 대장’이었다. 결국 잘 보관해두었던 통장은 그해 겨울 숙소 온돌 장판 밑에서 색이 바란 채 발견되었다고.
친구들이 기억하는 박찬호의 별명은? 의외로 ‘짠돌이’였다. 고등학교 시절 오 코치와 홍원기(32·두산), 손혁(32·전 LG), 박찬호가 뭉쳐 다니면서도 박찬호로부터 밥 한 번 얻어먹은 적이 없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매년 공주의 중동초등학교, 공주 중고등 학교에 각각 1천만원씩 기부 할 정도로 통 큰 ‘모교 사랑맨’으로 바뀌었으니 친구들로서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천방지축 서재응
공주 방문에 이어 찾아간 곳은 광주 제일의 명문고 광주일고. 광주일고에는 메이저리그 3인방을 직접 스카우트해서 가르쳤던 허세암 감독(40)이 그대로 모교를 지키고 있었다. 허 감독은 95년 청룡기대회에서 세 선수를 이끌고 우승을 차지했던 감동을 아직도 간직하며 또 다른 메이저리거를 길러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천방지축’ 서재응, ‘꾀돌이’ 김병현, ‘순진소녀’ 최희섭. 허 감독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광주일고 3인방을 이렇게 회상했다.
최고로 활달한 성격을 가졌던 서재응은 ‘쿨 가이’란 지금의 별명답게 동료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외향적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승부욕 또한 넘쳐흘러서 패배한 날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 번은 배구하다가 손가락을 삐끗해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으려 하자 깁스한 붕대를 풀면서까지 출전에 대한 열의를 보여 경기에 내보냈더니 끝내 경기를 승리로 이끈 적도 있었단다.
서재응의 원래 포지션은 투수가 아닌 3루수. 하지만 강한 어깨와 완벽한 투구 폼에 매료된 허 감독은 서재응을 투수로 전향시켰고, 결국 지금의 서재응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꾀돌이 김병현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진 김병현. 학창시절에도 지금처럼 조용히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선수들을 이끄는 리더십과 책임감은 그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야구에 대한 고집과 열의는 너무도 확고해서 감독 자신도 꺾지 못할 때가 많았다고. 허 감독은 고교시절 그의 작은 체구와 재빠른 몸집 때문에 최고의 유격수로 키울 구상을 하고 있었지만 투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신감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했다.
또한 김병현은 두뇌가 뛰어나 가르치는 것을 쉽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허 감독은 “머리가 너무 좋아 운동을 안 하고 공부를 했었어도 성공했을 선수”라고 했지만 김병현과 같은 반 생활을 했던 김영훈씨(27)는 “수업시간 내내 잠만 잤다”며 절대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웃음을 보였다. 김병현을 가르쳤던 광주일고의 한 교사에 따르면 성적표를 공개할 수는 없지만 성적은 하위권에서 맴돌았다고 전했다.
순진총각 최희섭
덩치로 보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빅 초이’ 최희섭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시골 총각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그의 건장한 체격에 겁부터 먹고 들어가지만 그와 한마디라도 대화를 나누면 그런 선입견은 바로 사라진다고. 오히려 붙임성 있는 성격에 귀여움(?)까지 느낄 수 있다고 하니 허 감독이 ‘순진소녀’라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특히 순수한 성품과 맑은 영혼(?) 덕에 시키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열심히 하는 연습벌레였다. 가장 학생다운 정신력을 가진 선수로 최희섭을 기억하는 이유도 다 이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에 임하면 승부사로 돌변, 당시 전국 어느 투수도 그와 상대하는 것을 꺼려했다. 이에 대해 고려대 선배인 김상호씨(27)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아마 상대 투수들이 희섭이 하고 대화해 보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라며 최희섭의 덩치에 상대 투수들이 겁부터 먹은 것이라며 최희섭의 타고난 체격을 부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