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1일 20시간이 넘는 고생 끝에 토트넘 구단 연습장에서 이영표를 만났다.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머나먼 맨체스터
지난 9월20일 오전 9시45분. 인천공항에서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파리를 경유해서 맨체스터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맨체스터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 시각으로 오후 4시45분. 한국 시간으로 다음날 새벽 1시45분이었다.
장장 16시간의 비행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입국심사. 1시간30분 동안 길게 늘어서 있는 줄이 줄어들기만 기다린 끝에 제일 ‘까칠해 보이는’ 심사원을 상대로, 입국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정성껏(?) 설명한 뒤에야 가까스로 통과했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공항을 빠져나온 시간이 6시30분, 도착 후 두 시간 가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순간 박지성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 먼 거리를, 엄청난 이동 시간을 보낸 끝에 인터뷰를 하러 가야 하는 선수라는 사실이 제대로 실감됐던 것.
그러나 바로 박지성을 만난 것은 아니다. 우선 21일 이영표를 인터뷰하기로 출국 전에 스케줄이 잡히는 바람에 맨체스터에서 다시 런던을 거쳐 북부에 있는 토트넘으로 가는 ‘어리석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 이영표 선수. | ||
9월21일 이른 아침 맨체스터의 피카델리역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고속기차에 몸을 실었다. 버스가 막히는 바람에 정류장에서 기차역까지 엄청난 거리를 마치 1백미터 달리기하는 심정으로 뛰는 바람에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2시간30분 후 런던 유스턴역에서 기차는 멈췄고 복잡하고 지저분한 북부행 런던 지하철로 갈아탄 후 토트넘 헤일역에서 내려 또 다시 택시를 탔다. 10분도 채 되지 않은 거리였지만 택시 요금이 24파운드(약 4만8천원)나 나왔다. 살인적인 영국의 물가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토트넘 연습구장의 라커에서 나오는 이영표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목이 멜 지경이었다. 너무나 먼 길을 달려온 데다 선수들과 밝은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이영표의 모습에서 뿌듯한 ‘뭔가’가 느껴졌다.
이영표는 새로 집을 구한 뒤 집 정리에 정신이 없다며 바쁜 일상들을 털어놓았다. 기자를 만난 날도 집에서 청소하다 바로 연습장에 왔다면서 영국 생활 초보자다운 소감을 전했다.
이영표는 인터뷰를 하다 말고 부상중인 다른 선수와 함께 런던 시내에 있는 한 양복점에서 선수들이 입는 양복을 맞춰야 한다며 차에 올라탔다. 인터뷰는 차에서 진행됐고 이영표는 팀 주무가 탄 차를 쫓아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런던 시내로 후원받은 스포티지차를 끌고 ‘돌진 앞으로!’를 외쳤다.
이영표가 찾은 곳은 한눈에 고급 양복점임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호화로웠다. 1시간30분이 걸려 도착한 양복점에서 간단하게 치수만 재고 볼일을 끝낸 이영표는 프리미어리그 구단의 최고급 마인드에 흐뭇해하면서도 연신 “아무 데서나 옷을 맞춰 입으면 될 것을 굳이 차 막히는 런던 시내까지 나와 고급 양복점을 찾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농담 섞인 불평을 늘어놓았다.
PSV 에인트호벤과 어렵게 이별하고 프리미어리그에 첫 발을 내디딘 이영표는 비록 전날 팀이 2부리그의 하위팀에 0-1로 패하긴 했지만 입단하자마자 3게임 연속 풀타임 출장을 한 사실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 (사진위)지난 22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구단 앞에 선 박지성. 맨유는 철저한 선수 관리로 유명하다. (사진아래)평소 기자를 ‘이모 기자’라 부르는 ‘조카’ 박지성을 오랜만에 만났다. 박지성은 한국팬들의 조바심과 달리 매우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사진=임준선 기자 kj | ||
맨체스터는 2백만 명 정도의 인구가 모여 사는 영국의 대도시다. 축구 외엔 딱히 다른 여가 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한적하고 여유로운 전원생활을 즐기는 도시다.
기자는 일반 사람들이 박지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택시를 탈 때마다 박지성이란 선수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모두 박지성을 알고 있었고 그가 한국에서 온 선수이고 현재 어떤 플레이를 하고 있는지 줄줄 읊을 정도였다. 평가도 좋았다. 특히 유럽 선수들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체력에 대해선 모두 한마디씩 덧붙였다.
박지성이 속해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선수 보호’를 위해 철저한 통제와 관리를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아무리 16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온 한국 기자라고 해도 사전에 구단을 통해 인터뷰 약속을 받아내지 못하면 박지성 얼굴도 못 보고 돌아서야 한다. 맨유는 퍼거슨 감독 기자회견장에도 출입 기자를 제한할 만큼 영국의 몇몇 언론사를 제외하곤 언론사에 대한 배려가 ‘배짱 수준’이다. 그래도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이 모인 팀인 만큼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취재를 하려는 열기가 대단하다.
맨체스터에 사는 사람들은 맨유 경기를 보는 게 소원일 만큼 맨유 경기는 늘 관중으로 차고 넘친다. 그런데 맨유의 홈경기장인 올드 트래포트는 6만7천5백명 정원에 6만명이 정규회원이라 표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더욱이 시즌 회원권이 약 2천만원, 평생 회원권은 1억2천만원의 어마어마한 액수를 지불해야 하는데도 회원은 매년 증가 추세라고 한다. 표 값도 제일 싼 좌석이 50파운드(약 10만원)지만 맨체스터 시티와의 더비 경기에는 암표값이 1백70파운드(약 34만원), 첼시와의 라이벌전에는 3백파운드(약 60만원)까지 오른다.
맨체스터의 축구 꿈나무들은 맨유 유소년팀에 들어가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다. 긱스, 스콜스, 베컴 등이 유소년클럽 출신이라 이에 대한 호감도는 엄청나게 상승돼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맨체스터 시민들한테 맨유는 희망의 상징이자 명예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박지성 부모를 만나다
박지성을 인터뷰하러 칼링턴 연습구장을 찾았을 때 마침 박지성의 부모도 그곳에 와 있었다. 박지성 어머니와는 오랜만의 해후라 반가운 포옹으로 인사를 나눴다. 박지성의 에이전트사인 FC코퍼레이션에서는 김정일 팀장과 김정수 과장이 직접 현지에 나와 박지성의 손발이 돼 움직이고 있다. 부모는 물론 친형처럼 흉허물없이 지내는 ‘도우미’들과 함께 지내는 박지성에게선 외로움이란 흔적조차 없어 보였다.
한국 언론들은 박지성의 경기 출장 시간과 첫 골이 언제 터지느냐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지만 적어도 맨유에서 만난 박지성한테선 그런 걱정과 조바심은 존재하지도 않은 듯했다.
박지성은 기자와 만나기 전날 인터넷 개통식을 가졌다고 한다. 두 달을 훨씬 넘게 기다린 끝에 만나게 된 인터넷이었다.
박지성은 맨체스터의 부자촌이라고 알려진 윔스로우의 빌라촌에 집을 얻었는데 대지 면적만 3백 평이고 2층 집에다 집 앞뒤로 ‘저 푸른 초원’처럼 드넓은 잔디가 펼쳐져 있다. 13억원이 넘는 이 집의 구입비는 모두 구단에서 부담했고 빈 집에 모든 집기와 가구들을 세팅하는 몫도 구단 직원이 상주하면서 전담해 주고 있었다.
박지성은 이삿짐을 옮기려다 구단 직원의 만류로 서서 지켜만 봐야 했다고 한다. 자칫 잘못해서 이삿짐을 나르다 선수가 다치기라도 할 경우 모든 책임을 직원이 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네덜란드 시절 아파트 생활을 했던 박지성은 선수가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만드는 구단의 남다른 배려에 새삼 프리미어리그의 생활에 대해 실감과 만족을 하고 있는 중이다. 선수의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 수거에 청소까지 해주는 데다 선수의 집 전화번호가 발신 표시되지 않게 차단해 놓은 구단은 아마도 맨유밖에 없을 거라면서 말이다.
다음주에는 프랑스에서 허벅지 부상으로 고생중인 안정환을 만나러 갈 예정이다. 그 역시 박지성과 비슷한 시기에 인터넷이 개통돼 ‘오 해피 데이’를 외치고 있다고 한다. 안정환의 아내, 딸 리원이, 그리고 통역과 소속사 직원과 함께 살고 있는 안정환의, 고달프면서도 도전하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는 프랑스 생활을 직접 보고 소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