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29일 노무현 대통령과 이재오(왼쪽), 김한길 양당 원내대표가 청와대에서 회동을 가졌다. 이날 노 대통령은 사학법 재개정과 관련해 오히려 여당의 양보를 요청했다는 후문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여야는 몇 개월을 끌어온 사학법 재개정 합의에 결국 실패했다. 여당은 노 대통령의 ‘야당안 수용’ 권고도 걷어차 버렸다. 그런데 이를 두고 말들이 많다. 일각에서는 더 이상 말발이 먹히지 않는 노 대통령의 레임덕이 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노 대통령이 뻔히 여당의 ‘노’(NO) 사인을 읽었으면서도 국정 조정자로서 명분을 얻기 위해 야당안 수용을 권고하며 선심을 썼다고 주장한다. 즉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정치 9단’ 노 대통령을 잘 아는 인사들은 이번 사태의 본질을 ‘대연정’ 구상의 연장선이라고 보고 있다. 5·31 지방선거 뒤 불어닥칠 정계개편의 ‘단초’를 살짝 보여줬다는 것이다. 과연 노 대통령의 ‘양보 정치’에는 어떤 비밀이 담겨 있는 걸까. ‘야당안 수용 권고’ 발언 속에 숨어 있는 대통령의 복심을 좇아가 봤다.
“무슨 여당이 대통령 말도 안 듣느냐?” “우리는 원래 그런 당이다.”
여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학법 양보 권고를 걷어차버렸다.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하던 시대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사태다. 하지만 당·정 분리 원칙을 내세운 참여정부에서는 ‘원래 그런 당’이라며 변명해도 뭐라 말할 수 없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밝혀온 ‘대연정’의 화합 정치에 대한 진정성을 여당이 거부했다는 점에서 그 생채기가 쓰라릴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 9단’ 노 대통령은 왜 여당에 의해 생채기가 날 수 있는 뻔한 카드를 던졌던 걸까. 대통령의 ‘영’이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레임덕’이 올 것을 뻔히 알면서 왜 그는 그런 사태를 재촉하는 것일까.
먼저 일부 언론에서는 이번 사태를 노 대통령의 제안이 의원총회와 최고위원회의라는 공식 회의체를 거쳐 거부당했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에 큰 흠집이 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동안 노 대통령의 레임덕 ‘이력’을 보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노 대통령은 지난 2004년 헌법재판소의 수도이전 위헌결정 때부터 레임덕 논란에 휩싸여왔다. 그 뒤 여당이 연이어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를 당하자 레임덕 불씨는 더욱 뜨거워졌다. 그래서 여당 공식회의에서 “대통령이 신이라도 되느냐”는 따위의 항명성 발언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던 것이다.
노 대통령은 올해 초에도 유시민 입각 파동 때문에 당과 충돌했다. 인사권마저 견제하는 여권 기류에 노 대통령의 자존심도 적잖이 상처가 났다. 그러다가 이해찬 총리 거취 파문까지 겹치자 더욱 당·정 간의 거리는 멀어졌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이번 여당의 ‘항명’ 사태도 그리 큰 사건은 아니다. 단지 그동안 지속되어온 레임덕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순간일 뿐이었다.
노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도 여당 의원들이 그를 ‘물’로 보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이 여당 내부의 ‘안티’ 분위기를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이번 사태를 접했을 때도 노 대통령은 그리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과 오랜 시절 정치를 같이 해왔던 측근 A 씨는 이에 대해 “대통령의 영이 안 섰던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노 대통령은 그런 일에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라면서 “따지고 보면 그 연원은 그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뒤 치른 지방선거에 참패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때 동교동 측에서 얼마나 노 후보를 흔들어댔나. 경선을 통해 후보를 확정했지만 인물이 안 된다고 보고 그것을 뒤집으려고 했던 것 아닌가. 당시 노 대통령은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예전에 비하면 지금의 레임덕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심지어 스스로 ‘임기 시작부터 레임덕이었다’고 말한 적도 있지 않았나. 이번 사태는 레임덕 축에도 못 들어간다. 그보다는 노 대통령이 레임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뚜벅뚜벅 가는 길이 어떤 곳인지 잘 보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 노무현 대통령이 정동영 의장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5월 1일 독도를 방문한 정 의장. 국회사진기자단 | ||
그렇다면 과연 노 대통령은 ‘여당 양보 발언’을 통해 무엇을 노렸던 것일까. 여기에서 나오는 일각의 해석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설이다. 이는 주로 한나라당에서 나오는 ‘음모론’적 시각에서 비롯된다. 노 대통령은 여당이 자신의 양보 권유를 거부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여당으로서는 개혁 이미지를 선명하게 내보일 수 있고 자신은 국정의 총괄 책임자이자 중재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다. 여기에는 곧 한나라당을 수구 정당으로 내몰아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흩어진 지지세력을 모으려는 ‘원려’(遠慮)도 깔려 있다는 것.
여권의 핵심 당직자는 “노 대통령이 당·정·청 수뇌부의 ‘사학법 1년 시행 뒤 재개정’ 건의를 무시하고 일방적인 양보를 요구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역시 대통령은 정치 10단이다. 선거판의 분수령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현재의 분위기대로 선거가 끝날 경우 참패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판을 흔들어줬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같은 분석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개연성이 커보이지 않는다. 먼저 양측이 짜고 치는 고스톱을 통해서 얻을 실익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여권은 민생법안 통과로 흩어진 지지세력을 다시 모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그것이 지방선거의 ‘표심’으로 연결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양측이 그 정도의 물밑 조율을 해서 판을 엎을 정도라면 열린우리당도 지지율 상승에 대한 확실한 전제를 깔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민생법안 통과는 오히려 한나라당 지지세력의 결집을 부를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노 대통령과 여권이 조율을 했던 것이 아니라 노 대통령이 오히려 열린우리당의 뒤통수를 쳤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여야 원내대표 회담 전에 여권 수뇌부와 회동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는 야당을 설득하기로 ‘작전’을 짰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오히려 원내대표 회동에서 전격적으로 양보를 요구하며 여당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이와 조금 다른 해석으로 노 대통령이 여권 수뇌부 회의에서도 여당 양보안을 먼저 꺼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어떤 쪽 해석이든 노 대통령이 여권과 사전 조율을 한 뒤 ‘양보 발언’을 한 게 아니라 오히려 여당과 결별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당이 지금 좋아하고 있지만 노 대통령은 자신의 진정성을 몰라주는 여당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노 대통령이 평소 열린우리당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는 뜻과도 통할 수 있다. 앞서의 노 대통령 측근 A 씨는 이에 대해 “다음 판에 죽을 사람과 굳이 짜고 고스톱을 칠 이유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A 씨는 이어서 “내가 보기에 노 대통령은 결국 정 의장이 여권의 차기 대권주자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노 대통령이 여권의 불확실한 대권주자 정동영 의장과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을 벌여서 얻을 실익이 뭐가 있겠나. 오히려 노 대통령은 그들과 결별을 준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의 이러한 ‘여당 거리 두기’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노 대통령의 ‘양보 발언’은 ‘5·31 지방선거’ 뒤의 정계개편을 겨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지난해 노 대통령이 제기했던 ‘대연정’을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최순영 민주노동당 의원은 최근 이와 관련해 “노 대통령이 사실상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선언한 것이다. 그것은 노무현 정권이 더 이상 개혁정권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사실상 한나라당의 사학법 재개정에 손을 들어 준 것은 ‘대연정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장기적 포석’이라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4·30 재보선에서 참패한 뒤 야당에 ‘대연정’을 제의했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가 제안을 거부해 명분을 잃었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대연정에 대해 계속 애착을 보이고 있다는 전언도 있다. 앞서의 노 대통령 측근 A 씨 이야기를 들어보자.
“노 대통령 입장에서 보자면 사학법을 다시 손질하더라도 재개정 안에 ‘등’자 하나 넣는 것밖에 다를 게 없다. 기본 목표는 사학이 제대로 투명하게 운영되는 것이다. 그 외에는 큰 의미가 없다. 자구 하나에 연연할 사람이 아니다. 정작 대통령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은 다른 쪽이다. 노 대통령은 3년 넘게 국정을 운영해 오면서 여야의 극한 대립과 제로섬 게임을 기필코 바꾸어야 한다고 결심한 것 같다. 노 대통령은 여야 정쟁이 막을 내리게 하고 동시에 새로운 정치판을 짜는 것을 자신의 최대 치적으로 삼으려 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여당은 또 한번 노 대통령의 순수한 뜻을 모르고 뒤통수를 친 셈이다. 대통령이 그들에게 과연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대연정을 통해 무엇을 노리고 있을까. 일단 탈당카드로 정파적 이익에서 멀어지려고 할 것이다. 공평무사한 국정 운영을 통해 집권 후반기를 잘 마무리하려는 뜻이 숨어 있다. 그밖에 더 없을까? 노 대통령이 권력 재창출의 ‘장대한 포부’를 계속 가지고 있다면 대연정이라는 새로운 정치판에서 새로운 권력을 또 한번 만들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