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갑자기 대한민국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나타난 인공지능 ‘알파고’는 바둑을 아는 사람은 물론 바둑을 모르는 일반인들도 충격에 빠뜨렸다. 컴퓨터의 우수성이야 새삼 말할 필요가 없지만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별들을 합친 숫자보다 변화가 많다는 바둑이 이렇게 쉽게 정복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알파고’만의 독특한 사고력에 많은 바둑 기사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고 알파고가 바둑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고 입을 모았다. ‘알파고’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고, 어떤 것을 보여줬던 것일까.
‘전투란 전투는 다 이긴 것 같은데 승부에선 패했다.’ 2국을 마친 이세돌 9단의 표정에 당황스러움과 씁쓸함이 교차한다.
3월 10일 오후 5시 무렵,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 6층. 해설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곳곳에서 탄식을 쏟아냈다. 전날 열린 1국에서 패한 이세돌 9단이 2국에서도 패배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
1국은 인공지능을 처음 상대해봤으니 그럴 수 있다 쳐도 2국의 내용은 충격이었다. 전투란 전투는 모두 이세돌 9단이 이긴 것 같은데 막상 전체 형세를 살펴보면 최소 비슷한 형세이거나 알파고가 앞서고 있어 프로 기사들의 머리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TV에서 2국을 해설한 송태곤 9단은 “알파고의 수법은 그동안 인간들이 수백년 동안 이어온 상식을 깨트린 것이 많다. 사람이라면, 일류 프로기사라면 도저히 둘 수 없는 수법을 태연히 구사한다. 그러면 당연히 결과가 안 좋아야 되는데 몇 수 지나고 보면 희한하게 균형이 맞아있다. 이런 경험은 바둑을 배운 이래 처음이다. 무척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김성룡 9단도 마찬가지. “우리가 인공지능을 잘 못 본 것 같다. 처음 이 대결이 기획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알파고가 잘 버텨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번쯤 이겨줘서 바둑에 쏠린 관심을 계속 이어가길 바랐다. 이런 결과는 전혀 예상 못했다”고 당혹스런 소감을 밝혔다.
그렇다면 알파고의 상식을 넘어선 신선한 수법들이란 어떤 것들일까.
위부터 1, 2, 3도
하지만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 흑1은 패착이었다. 백2부터 12까지가 알파고의 응답. 흑은 우변에 편재됐고 백은 상변 전장을 최대한 넓히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이세돌은 상변 전투에서 주도권을 빼앗기며 끝까지 알파고에 끌려 다녔다.
<2도>는 신선함을 넘어 ‘바둑의 패러다임을 바꾼 한 수’라는 평을 들었던 대범한 수. ‘우주류’ 다케미야 9단조차 망설였을 5선의 어깨짚음도 알파고는 태연히 구사한다. 그것도 이세돌이라는 당대의 고수를 상대로. 엄청난 감각.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멋지다.
<1도>와 <2도>를 통해 전장을 찾는 기술과 낭만을 보여줬다면 <3도>에서는 이기는 길을 찾아가는 인공지능의 냉정함을 보여준다. 흑1로 걸쳤을 때 백2가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수. 당장 두지 않아도 별 수 없는 곳을 알파고는 태연히 흑 두 점을 잡아둔다. 이것으로 백 모양에 남아있던 뒷맛은 모두 제거되었다. 흑3의 양걸침은 기분 나쁘지만 백4로 붙여 좌하는 살기만 하면 된다는 게 알파고의 계산. 이후 알파고는 하변을 흑에게 내줬지만 선수를 뽑아 A로 쳐들어가 승부를 결정지어 버린다.
그렇다면 지난 10월 판후이와의 대결 이후 5개월 만에 다시 성장을 거듭한 알파고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전문가들은 ‘머신러닝’이라는 기계학습에 주목한다. 알파고에 주입된 머신러닝은 컴퓨터가 미리 입력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하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단순한 고수들의 기보 입력만으로도 스스로 자가 발전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알파고의 급성장에는 중국 프로기사들의 도움도 있었다. 최근 내한한 중국 최대 인터넷바둑사이트 혁성의 이철용 대표는 중국 프로기사들이 알파고의 성장에 일조했음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그는 “세계대회 우승도 경험한 중국 톱 프로기사 중 한 명인 저우루이양 9단이 상당 기간 영국에 머물렀다는 정보가 있었다. 최근 그를 만난 김에 영국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여행했다며 웃더라. 물론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다. 아마 구글 측이 함구령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중국 기사들이 구글의 인공지능 연구에 도움을 줬다는 것은 중국에선 공공연한 비밀이다”며 구글의 숨은 노력(?)을 인정했다.
구글은 지난 2001년 이후 14년 간 인공지능 관련기업 인수 및 연구에 280억 달러(약 33조 7000억원)을 쏟아 부었다. 조금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바둑을 뛰어넘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인공지능의 도전을 뿌리치지 못한 바둑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비관론과 낙관론이 난무한다. 갑작스런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바둑계는 혼란스러워졌다. 일단 지켜볼 일이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