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세리가 세계적인 골프선수로 성장한 뒤에는 아버지 박준철씨(왼쪽)의 눈물겨운 헌신이 숨어 있었다.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그 첫 번째로 한국의 골프 위상을 세계에 알리며 수많은 후배들을 미LPGA로 이끈 골퍼 박세리(28·CJ)의 성공기가 아버지이자 ‘영원한 스승’인 박준철씨(56)의 구술로 정리됩니다. LPGA 통산 22승(메이저 4승)에 빛나는 박세리는 LPGA 명예의 전당 가입을 예약해 놓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여자 골퍼입니다.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와 골퍼를 자녀로 둔 부모에게 전하는 메시지 등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박준철이란 내 이름보다는 ‘세리 아빠’로 더 유명해진 내가 새해에는 대학 강단에도 선다. 대학도 안 나온 사람이 무슨 강의를 맡느냐고 의아해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동안 세리를 세계적인 골프선수로 키워온 데 대한 내 능력을 인정해 주는 부분이라고 여기고 고민 끝에 수락했다.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다고 하니 누구보다 세리가 반색을 하고 진심으로 기뻐해 준다.
우린 여느 부녀지간과는 다르다. 아버지와 딸은 오로지 목표만을 향해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에서 가시덤불을 헤치고 넘어지고 자빠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울고 웃었다. 그리고 주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친 놈’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오직 세리를 훌륭한 골퍼로 만들기 위해 돈과 편견과 싸우고 기존의 틀에 저항하면서 잡초처럼 살아왔다.
# 남달랐던 운동신경
어린 나이에 세리 엄마(김정숙씨)와 ‘사연 많은’ 웨딩 스토리를 쓴 나는 딸만 셋을 두었다. 큰딸 유리와 둘째딸 세리, 그리고 막내딸 애리가 우리 집의 ‘보물상자’들이었다. 딸 셋 중 유독 세리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았다. 돌도 안 된 애가 업히기를 거부하고 혼자서 걸어 다니려고 애썼다. 제대로 걸을 때쯤에는 무엇에든지 올라타는 걸 좋아했다. 세리의 어린시절 사진을 보면 나무에 올라타서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다.
운동 신경을 타고난 세리는 동네 달리기에선 죄다 1등을 차지했고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육상과 포환선수로 뛰며 지는 법을 몰랐다.
세리가 골프와 인연을 맺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하와이 이민 시절에 발생했다. 사업 때문에 친구들과 골프 내기를 즐겨했던 난 집 근처의 공원에서 세리와 함께 어프로치 연습을 했었다. 당시 어린 세리한테 골프채를 하나 쥐어주고 저 멀리 세워둔 다음 내가 공을 치면 다시 그 공을 내가 있는 쪽으로 치게 했다.
# 내딸이 골프신동?
난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야 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보니 그릇 닦는 일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 마디로 ‘기러기 아빠’가 된 것이다. 그때 귀국 전에 세리한테 8번채를 주고 나왔다. 심심할 때마다 연습해 보라고 했는데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다 세리가 6학년 때 미국에 남아있던 가족들이 모두 한국으로 들어왔다. 세리를 보자마자 유성의 골프연습장으로 데려갔다. 그때 난 세리의 스윙을 보면서 ‘바로 이거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여느 골퍼 못지 않은 폼이 나왔고 비거리가 상당했다. 그때부터 난 아빠가 아닌 골프 선생으로 탈바꿈하며 세리와 길고 긴 동행을 시작했다.
# 미친놈 소리 들어가며
내가 세리를 데리고 다니며 골프를 하자 주위의 반응들이 심상치 않았다. 하루는 유성CC에서 추운 겨울에 연습을 하고 내려온 세리와 함께 우동이나 한 그릇 먹으러 휴게소에 들어갔다가 아는 선배를 만났다. 그랬더니 그 선배 왈, “야, 임마! 네 주제에 골프는 무슨 골프야. 네가 고집피우다가 애도 죽고 너도 죽어. 내 앞으로 이름 달아놓고 국수나 먹고 가.”
세리 손을 이끌고 난 그 휴게소를 그냥 나와 버렸다. 그러면서 아빠의 초라한 모습에 울고 있던 세리한테 난 이렇게 말했다. “너, 지금 저 사람 하는 얘기 똑똑히 들었지. 저 사람이 언젠가는 아빠 앞에서 머리 숙일 날이 있을 거야. 네가 그렇게 해줄 것이기 때문에 아빠는 신경 안 써. 세리야, 울지마. 걱정말라구!”
(다음 호에 계속)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