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8년 잡지 <스타채널>에 실렸던 박세리와 아버지 박준철씨의 라운딩 사진. | ||
올해 명예의 전당 입당을 앞두고 미국 올랜도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재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박세리. 그리고 그를 키운 ‘영원한 스승’ 아버지 박준철씨. 박준철씨가 직접 정리하는 ‘별들의 탄생신화’ 박세리편 두 번째를 소개한다.
‘시골 촌놈’의 상경기
1992년 5월로 기억된다. 세리가 6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골프를 배우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골프다이제스트배 주니어 선수권대회에 출전을 하게 됐다. 대회장에 가보니까 여중부에서 이름을 날리는 골퍼들이 총출동했다. 권오연, 김미현, 한희원….
난 그 선수들의 부모한테 찾아가 허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세리 애비되는 사람입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춰 정중히 인사를 했지만 어느 누구도 내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세리가 창피하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난 세리한테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세리야. 인사드려. 얘가 권오연이고 쟤가 김미현이여. 여중부에서 골프를 최고로 잘 치는 선수들이니까 똑똑히 봐둬.”
주로 서울에서 골프를 쳤던 선수나 그 부모들 눈에는 세리와 내 존재가 ‘시골 촌놈’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당연히 그런 내 모습이 세리 눈에는 한없이 초라하게 비쳤을 것이다. 그런데 난 오히려 그런 현실이 세리한테 좋은 자극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이후 세리는 예선에서 곧잘 떨어졌다. 그러나 컷오프된 다른 선수들이 짐을 싸서 대회장을 떠날 때 우린 그곳을 대회가 끝날 때까지 지켰다. 다른 선수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세리의 심정은 갈기갈기 찢겨졌다. 그러나 난 도망가려는 세리의 손을 억지로 끌고 나와선 라운드를 쫓아다녔다. 컷 통과된 선수들이 어떻게 경기를 풀어가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라는 의미였다.
대회를 지켜보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숙소였는지도 모른다. 서울 출신의 선수들이 호텔에서 잘 때 우린 여관도 아닌 여인숙을 전전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난 상관없었지만 어린 세리 마음엔 큰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던 승용차도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고물차라 다른 사람들 보는 데서 끌고 다니기가 참으로 민망할 정도였다.
최연소 챔피언 먹고…
1993년 5월 세리가 중학교 3학년 때 제4회 라일앤 스코트 여자오픈에 출전했다. 그때 시합 전 우승 트로피가 있는 데 세리를 데리고 갔다. 많은 사람들이 우승 트로피를 구경하며 얘기를 주고받는데 난 사진기자 앞에서 세리한테 포즈를 취하라고 ‘명령’했다. 세리가 완강히 거부하며 “아빠, 왜 그러세요?”하고 물었지만 무조건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한 마디 했다. “세리야, 이거 니 거여. 왜 그런 줄 알어? 네가 그동안 충분히 연습을 했으니까 니 거란 말여.”
순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이런 소리도 들렸다. “어, 저 놈 미친 놈이네. 촌에서 와 가지고 뭐? 뭘 가지고 간다고?”
난 그들의 빈정거림이 빈정거림으로 들리지 않았다. 내 믿음은 세리가 우승한다는 것이었고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또 믿었던 것이다.
게임이 잘 풀리려는지 세리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원재숙 프로와 동타를 이룬 후 연장 첫 홀에서 버디를 잡더니 결국 그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내가 미리 ‘세리 것’이라고 찜했던 우승컵이 손에 들어오는 순간 난 가슴으로 울 수밖에 없었다. 세리는 이 우승으로 국내 오픈대회 사상 최연소 챔피언이라는 값진 타이틀까지 안았다.
세리 골프에 미쳤던 나
세리가 본격적으로 골프를 시작한 후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내가 사업에서 손을 떼고 세리만 쫓아다니다 보니 집에 돈이 생길 리 만무했다. 특히 골프는 이래저래 돈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종목 아닌가.
세리 엄마의 반대가 점점 거세졌다. 우리 집에는 세리뿐만 아니라 돌봐야할 두 명의 딸이 더 있었고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끊임없이 돈이 들어가는 세리한테 더 이상 퍼 넣을 돈도 없었던 것이다. 가족들이 보기에도 내 모습은 한 마디로 ‘미쳤다’였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운동, 그것도 골프는 미치지 않고는 잘 할 수가 없다. 난 그 당시 세리의 골프에 미쳤고 다행히도 세리가 ‘미친 아빠’를 잘 받아줬고, 잘 소화해내준 것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유성에서 월세 5만원짜리 단칸방에 살았다. 이웃 사람들 눈에는 ‘주제도 못 되는 놈이 골프 한답시고 가족들 고생시키는 꼴’이었다. 가족들한테는 한없이 미안했지만 골프채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자는 세리를 보면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 번은 대회에 참가하려는데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대회장 근처에 숙소를 잡고 세리가 잠든 틈을 타 유성으로 와선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술을 마시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분위기 맞춰주고 ‘뻘짓’하다가 결국엔 용돈 몇 푼 받아서 다시 숙소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박준철이 친구들한테 머리 숙이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가 세리의 골프에 미쳤기 때문이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