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린우리당 정동영 당의장(단상 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근태 최고위원(단상 맨 오른쪽) 등이 지난 25일 오전 서울 영등포 당사에서 열린 긴급 비상총회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의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 | ||
사실 지방선거 뒤의 대폭적인 정계개편은 누구나 예상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대권주자 가시화와 개헌론이 맞물리는 올 연말쯤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그런데 열린우리당이 지방선거 ‘대패’ 수습책의 일환으로 정계개편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그 시기도 예상보다 훨씬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5·31 지방선거 뒤의 정계개편은 노태우 정권 시절의 3당 합당을 훌쩍 뛰어넘는 ‘대빅뱅’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여당을 탈당해 거국내각을 구성한다면 여야 구분이 없는 ‘제로베이스’에서 정계개편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기존의 정치 관행을 뛰어넘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대전환이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정가를 요동치게 만드는 정계개편 시나리오를 따라가봤다.
최근 열린우리당의 중진 A 의원은 한 술자리에서 그의 지인에게 그동안 쌓아왔던 자괴감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는 “열린우리당은 콩가루 당이다. 정당도 아니다. 지방선거만 끝나면 당장 없어질 것이다”라면서 “우리당 의원 가운데 40명 정도는 있으나마나 한, 의원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선거가 제대로 될 리가 있나. 개혁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A 의원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중책’을 맡아 선거를 이끌고 있는데 당 소속 의원들이 선거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고 선거 패배 뒤 자신들의 살 궁리에만 빠져 있다며 개탄했다고 한다.
여당은 현재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다. 지방선거 패배와 그 책임을 둘러싸고 치열한 당 내분이 예고되고 있다. 여기에 앞서의 A 의원 토로처럼 최소한 당을 유지할 만한 서로간의 신뢰감도 거의 없어진 상태다. 이러한 여당의 급속한 붕괴 조짐은 정계개편의 시기를 더욱 앞당기는 촉매로 작용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본격적인 정계개편 시점은 올 연말쯤으로 보는 게 대세였다. 정계개편의 단초가 될 개헌론을 논의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그때쯤 돼야 여야의 대권주자와 고건 전 총리의 거취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의 지방선거 패배 후유증이 예상외로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되면서 정치권의 빅뱅도 올 7~8월쯤으로 앞당겨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지방선거 뒤 예상해볼 수 있는 열린우리당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여당 지도부의 한 관계자는 “김근태 김두관 두 최고위원이 가장 먼저 ‘만세를 부를 것’(두 손 들고 사퇴를 한다는 의미)으로 전망된다. 김혁규 최고위원도 가세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광주 제주 등 일부 지역에서 터져나왔던 공천 문제를 놓고 지도부 공동책임론을 들고나올 것으로 본다. 정동영 의장이 개헌론 등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겠지만 두 최고위원이 사퇴할 경우 견디지 못하고 의장직을 사임한 뒤 백의종군을 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 5·31 지방선거 이후 정치권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탈당 후 이명박 시장 측과 ‘대연정’을 구성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에 참석한 노 대통령(오른쪽)과 이 시장. | ||
이러한 여당의 급격한 분열은 필연적으로 정계개편을 동반할 것이다. 먼저 청와대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노무현 대통령은 지방선거 뒤 탈당할 가능성이 크다. 노 대통령은 탈당이라는 카드를 통해 상대(야당)를 배려하며 ‘대통합의 정치’를 이루려 할 것이다. 이는 노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중 가장 중요한 치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대의명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 대통령은 ‘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또 다시 대연정 카드를 꺼내들 것으로 전망된다. 대연정을 다시 제안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추진할 확실한 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노 대통령에게는 이해찬 전 총리와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주축이 된 친노 세력의 신당 창당이 필수적이다. 그 뒤 친노 신당이 대연정 국면을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계산이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 가능성에 대해 “사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고 곧바로 거절당한 뒤 상당히 답답해했다고 한다. 자신의 ‘진심’을 몰라준다는 것이었다. 그때 박 대표도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에 마음이 좀 흔들린 것으로 안다. 하지만 당 일부에서 격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대상이 박 대표가 아니라 이명박 서울시장일 가능성이 있다. 그 명분은 민주화 세대와 개발 세대의 진정한 화해다. 최근 피습 사건으로 박 대표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면서 이 시장의 당내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이 시장은 박 대표와의 경쟁에서 한계를 느끼고 밖으로 튀어나갈 유혹을 많이 느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여권이 이 시장에게 ‘대연정’을 제안할 명분과 가능성도 커진다. 문제는 노 대통령이 레임덕 시기로 들어가면서 그만 한 정계개편을 지휘할 힘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여야가 함께 참여하는‘대연정’을 가능하게 하려면 중·대선거구제 개편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노 대통령이 분권형 권력체제인 내각제 개헌카드를 들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 현재 한나라당 영남권 의원들은 내각제 개헌에 호의적이다. 그래서 그들이 ‘역사적 대통합’을 명분으로 친노세력과 손을 잡을 경우 내각제를 위한 깃발을 올릴 수도 있다.
한나라당의 한 영남권 중진 의원은 이에 대해 “향후 정계개편 과정에서는 그동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발상의 대전환이 자주 일어날 것이다. 친노세력도 영남세력이 주축이기 때문에 한나라당과의 협력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종인 민주당 의원 등은 “여전히 국민 정서에는 내각제에 대한 불신이 숨어 있다. 내각제 개헌은 힘들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 고건 전 총리 | ||
먼저 정동영 의장이 최근 2007년 헌법 개정 필요성을 제기한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정 의장의 개헌론은 지방선거 이후 불거질 ‘지도부 책임론’을 희석시킬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다. 정 의장은 개헌에 부정적인 한나라당과의 대립을 극대화하는 것을 통해 내부 분열을 차단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이 지방선거 뒤 곧바로 ‘선거 책임론’과 ‘지도부 교체론’ 등으로 혼란에 빠져들 경우 개헌론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가능성도 크다. 그렇게 된다면 당은 차기 대권주자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이합집산’과 분당의 길로 빠져들 것이다.
두 번째 카드는 민주세력 대통합론이다. 이는 원래‘포스트 정동영’ 체제를 꿈꾸는 김근태 최고위원이 희망하는 정계개편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정동영 의장은 그 동안 ‘자강론’을 내세우며 민주세력 대통합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그런데 정 의장은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민주개혁세력 대연합론을 주장하며 김근태 최고위원의 정계개편 방식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 의장은 ‘민주개혁세력 대연합론’ 제기를 통해 당내 갈등을 희석시키고 지방선거 뒤의 정국을 대선 국면으로 이끌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한번 물이 새기 시작한 ‘난파선’의 선장 ‘말씀’을 선원들이 얼마나 따를지는 안갯속”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계개편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최근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한 한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만 분당할 가능성’이 1.2%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망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이명박 시장 입장에서는 한나라당에 2년 동안 박근혜 대표의 이미지가 많이 박혀 있기 때문에 당 개혁을 명분으로 야당 ‘리모델링’ 작업에 착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시장은 ‘오세훈 바람’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던 소장파와도 친분이 깊다. 소장파가 ‘발칙한 상상력’을 가지고 이 시장과 힘을 합칠 경우 새로운 당의 태동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과정에서 이명박 신당이 정치권의 ‘이명박파 총결집’을 이루어낼지가 최대의 관심사다. 여기에는 친노세력 등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만약 이 시장이 당을 깨고 나가 야당을 분열시킨다면 영원한 역사의 죄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보수세력의 재집권을 위해선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 대표로서는 ‘수성’의 입장이다. 최근의 피습 사건으로 박 대표의 당내 위상은 ‘대통령급’으로 격상됐다. 이는 각 정파들이 ‘될 사람’인 박 대표에게 다양한 정치적 딜을 제안할 가능성을 높여주는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박 대표가 해낼 수 있는 가장 큰 정계개편 카드는 민주당과의 합당이 될 수 있다. 이는 최근 동교동계의 한 여성 핵심인사가 DJ 정권 시절의 고위인사에게 “김 전 대통령이 차기 대선에서 박근혜 대표를 지지할 것이다”라고 단정적으로 언급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김 전 대통령이 남북 화해를 이루는 데 어느 정도 공헌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동서 화합과 대통합을 성사시키기 위해 박 대표를 지지할 것이란 시나리오다.
끝으로 고건 전 총리발 정계개편을 들 수 있다. 고 전 총리는 자신이 대권주자가 되어 모든 정파가 민주세력 대통합의 깃발 아래 모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위해 고 전 총리는 여야의 대권주자들이 하나씩 ‘탈락’되어 나가기를 ‘끝까지’ 기다릴 것이다. 고 전 총리 측에서는 “올 연말까지도 쉽게 결심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다릴 수 있는 데까지 기다리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이다”라고 밝혔다.
결국 지방선거 뒤 정계개편의 핵심은 여야 구분이 없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여권이 정계개편을 추진할 만한 ‘힘’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