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습 사건 이후 치료를 받고 지난 5월 29일 병원에서 퇴원하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바로 대전 유세장으로 향해 ‘오버’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국회사진기자단 | ||
훈련소 동기라 하더라도 두 사람의 ‘짬밥’은 차이가 난다. 박 대표가 테러 사건에 이은 지방선거 압승의 프리미엄을 업고 이 시장보다 한 발짝 앞서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대권 훈련소를 마치려면 1년 반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남아 있다. 이 기간동안 어떤 훈련을 거치느냐에 따라 1등 훈련병의 이름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우선 두 사람은 훈련소에서 배짱을 키워야 한다. 조바심에 빠져 성급하게 대권몰이에 나섰다가 자칫 허무하게 훈련소를 퇴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호가호위할 가능성이 있는 비선 조직 관리에도 철저해야 한다. 2007년 대권을 향한 ‘박-이 전쟁’의 막후를 따라가 본다.
지난 2001년 12월 31일 서울 프라자호텔의 한 식당. 한나라당 A 의원은 이회창 총재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당시 이 총재는 한나라당의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 당권까지 장악해 당내에는 ‘이회창 대세론’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A 의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 총재에게 “2002년 대선을 위해서 지금 당권을 놓아야 합니다. 지금 같은 대세론으로 시종일관 밀어붙일 경우 나중에 국민들이 식상해할 수도 있습니다. 당분간 정치권과 거리를 두십시오. 대선 몇 달 전에 다시 돌아와도 늦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총재님을 가슴 속에서 계속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당권을 놓는다고 해서 잊혀진다며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라며 간곡한 청을 올렸다.
하지만 당시 이 총재 주변에는 A 의원과 생각이 다른 의원들이 많았다. 그들은 “지금 당권을 놓으면 바로 죽습니다”라고 한다. 그 결과 이 총재는 패배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이명박 서울시장 간의 본격 대권 전쟁이 막이 올랐다. 두 사람이 그 전쟁을 이기기 위한 첫 번째 시험무대는 바로 인내심과 여유라고 지적하는 의원들이 많다.
A 의원은 “박 대표와 이 시장은 2002년 때 이회창 총재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현재 대권주자들이 당 대표와 서울시장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화려한 자리를 떠나 일개 정치인으로 돌아갈 경우 국민들에게 잊혀지지 않을까 조바심 낼 가능성이 크다. 당내 세력을 키우기 위해 무리수를 둘 수도 있다. 하지만 대권 싸움은 배짱과 인내력 싸움이다. 누가 끝까지 참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으로 본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얼마 전 박 대표의 ‘깜짝 대전행’은 인내하지 않고 깜짝 인기에 편승하려는 ‘오버’였다는 진단도 나온다. 한나라당 한 의원은 “박 대표가 퇴원 직후 ‘갈등을 치유하자’고 말한 뒤 곧바로 대전에 내려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박 대표가 피습 뒤 그의 강단 있는 리더십이 매우 좋은 평가를 받자 그것에 고무돼 오버했던 행보인 것 같다”고 꼬집었다. 특히 피습 사건을 사회 통합의 촉매제로 삼지 않고 자신의 인기를 올리기 위해 ‘이용’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명박 시장은 박 대표보다 훨씬 오버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거론되고 있다. 앞서의 의원은 “이 시장이 박 대표에 비해 당내 세력이 약하고 경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신당 창당으로 급선회할 경우 그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이 총재의 전철을 밟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시장은 최근 “박 대표나 나나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승복하지 않고 둘로 쪼개지면 한나라당은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다”라며 경선 불복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 지난 4월 25일 한나라당 서울시장후보선출대회에 참석한 이명박 서울시장. 박 대표의 지지율이 올라가면서 이 시장은 더욱 초조해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런데 박 대표의 한 측근은 이에 대해 “6개월씩이나 외국에 있어야 하느냐”며 펄쩍 뛰었다고 한다. 박 대표 참모들은 “6개월이면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여전히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으로 비친다.
이 시장도 당분간 ‘잠수’를 탈 예정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대선 도전 선언이) 금년은 지나야 할 것 같다. 그때까지 지방 농어촌 체험과 해외 방문, 공부를 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의 한 측근은 “올해 10월까지 해외 일정을 잡을 예정이다. 그런데 이 시장이 현직 의원도 아니고 박 대표는 계속 뜨고 있는 상황이라 올 가을쯤 되면 잊혀지는 것 아닌지 걱정스럽다”라고 말한다. 이 시장 측이 ‘서울시장 프리미엄’도 없고 ‘청계천 효과’를 이을 마땅한 이벤트도 없는 상황이라 박 대표보다는 훨씬 조바심을 낼 만한 처지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두 사람의 인내력은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한 차례 시험대에 오를 전망. 두 사람이 대권에 대한 욕심으로 대리인을 내세워 당권을 차지하기 위해 무리수를 둘 경우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이번 전당대회에서 “엄정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한다. 박 대표 측의 한 관계자는 “아직 박 대표 측에서 내세우는 ‘메인’(당권주자를 지칭)이 없는 상태다. 아마 앞으로도 특정인 지지 의사는 밝히지 않을 것이다. 박 대표는 조직을 만드는 일에 관심이 없다. 또 지금과 같은 상승세에 굳이 무리해서 당권을 장악해 대세론에 매몰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한편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최근 당 주변에서는 박 대표가 박희태 국회부의장을 관리형 대표로서 적합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밖에 맹형규 전 의원도 대체로 중립을 지킬 수 있는 관리형 지도자감으로 꼽히고 있다”고 밝혔다.
이 시장의 경우도 마찬가지. 자신의 계보로 인식되는 인물이 대표로 선출될 경우 그 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장은 피습 사건 뒤 박 대표 쪽으로 무게추가 가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전언이다. 참모진 사이에선 최소한 당권이라도 장악해 균형을 맞추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친이’ 계보로 불리는 이재오 원내대표의 행보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는 원내대표가 되기 전까지 이 시장과 가장 친분이 깊은 의원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원내대표가 된 뒤부터 이명박 시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한때 이 시장과의 관계가 틀어졌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원내대표가 이 시장 계보라는 비판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특히 한나라당 영남권 의원들은 여전히 이 대표가 이 시장 사람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다른 주장도 있다. 이 대표는 최근 “박 대표의 ‘용인’ 없이는 당 대표 당선이 힘들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한 의원에게 했다고 한다. 이 대표의 얘기를 들은 이 의원은 “이 대표는 더 이상 이 시장 계보가 아니라고 본다. 이 대표는 서울시장 후보 경선 과정에서 홍준표 의원을 버린 이 시장의 행태를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여기고 이 시장을 믿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 대표는 ‘박 대표가 막는다면 당 대표 당선도 어렵지 않겠느냐’며 박 대표에게 내심 구원의 손길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의 대권전쟁의 승패를 가를 또 다른 포인트에는 비선 조직과 측근들의 관리도 포함된다. 박 대표는 철저하게 공개적인 조직을 운영하기 때문에 비선 라인에 의한 불미스런 일은 적은 편이다. 하지만 최근 피습 정국에서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구설수에 올라 일부에선 “제2의 노사모가 될지도 모른다”며 박사모의 ‘월권’을 경고하고 나섰던 것으로 알려진다.
박 대표가 지방선거 전 깜짝 대전행을 결행했을 때의 일이다. 박 대표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퇴원한 뒤 곧바로 삼성동 자택으로 향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대전행 발표 불과 20분 전까지 당직자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일정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나라당 출입기자들은 여러 곳으로부터 “박 대표가 대전으로 내려가느냐”는 문의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영문을 모르던 기자들은 유정복 비서실장에게 대전행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박사모가 박 대표의 일정을 모두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 한나라당 출입기자는 “당시 당직자들을 포함해 대부분이 (박 대표가) 자택으로 가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대전행 배경을 두고 박사모가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박사모에서 당일 대전, 그 다음 제주, 그 다음 대구 투표 등의 일정을 자세하게 잡았다고 들었다. 당에서는 대전으로 가지 말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결정 과정에서 박사모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시장은 측근 관리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박 대표에 비해 비공개 사조직이 많기 때문이다. 주로 고려대 인맥과 서울시 인맥으로 양분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예전에는 고려대 인맥의 주니어-시니어 그룹 간에 치열한 노선 투쟁도 벌어지는 등 갈등을 빚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명박 시장 측은 현재 비선을 자임하는 조직이 너무 많아 그것들을 모두 정리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여러 곳에서 이 시장의 비밀 캠프라며 물의를 빚는 일들도 발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6월에 이 시장이 퇴임하면 다른 비선 조직을 모두 정리하고 여의도에 공식 캠프를 꾸려 공개적으로 운영할 것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들었다. 그만큼 사조직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게 아닌가 싶다”라고 말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