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돌(오른쪽)과 중국 후야오위의 대국 모습. 1993년 비공식적으로 실력을 겨뤘던 후야오위는 당시 열 살의 꼬마 이세돌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을 갖고 있다. 당시 후야오위는 ‘4도시 소년소녀 대항전’ 우승팀의 한 명이었다. | ||
풍운아 이세돌의 결혼 발표가 바로 그것이다.
폭풍 같은 기세로 순식간에 상대방을 제압하는 강력한 펀치력, 거침없는 언변, 천진난만한 미소로 많은 팬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인기 기사. 하지만 만 23세의 젊은 나이기에 이세돌의 결혼소식을 접한 바둑인들은 의외라고 반응하면서도 ‘과연 이세돌답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혼기가 꽉 찬 이창호의 결혼소식이 언제쯤이나 들려올까에 잔뜩 촉각을 세우고 있던 매스컴들은 이세돌의 속력 행마에 오히려 당황했다.
동갑내기 학원강사 김현진 양. 거친 야성의 사내를 조련한 조련사의 그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여리고 아리따운 외모의 주인공이다.
눈내리는 저녁, 지금은 N타워로 새롭게 단장한 남산타워에서 처음 프러포즈를 했다는 이세돌. 장소가 뜻밖이다. 남산타워라 하면 60~70년대 젊은 아베크족들의 아지트로 명성을 날리던 바로 그곳 아닌가. 파격과 신세대의 상징인 이세돌의 프러포즈 장소치고는 상당히 구시대적이다.
지인의 소개로 만나 1년여의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할 젊은 예비 신랑신부는 11월에 천호동에 보금자리를 꾸미고 그 전에는 다른 곳에서 원룸을 얻어 살 예정이다.
3월 12일로 잡은 결혼식은 마침 베이징에서 제6회 춘란배가 열리는 기간이다. 3월 9일에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선수들은 이창호 최철한 박영훈 고근태, 그리고 결혼식을 앞둔 이세돌이다. 10일에 개막식을 하고 11일이 1회전 시합이다. 2회전이 13일이니 이세돌은 1회전을 치르고 바로 서울로 날아와 결혼식을 올린 후 턱시도를 갈아입을 틈도 없이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2회전을 치러야 한다. 이세돌의 결혼식을 위해 춘란배를 연기할 수도 없는 일이니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결혼식을 007작전처럼 해치워야 할 형편이다. 비행기가 타기 싫어 지방대국 때 혼자서 기차를 타고 가는 이창호와 상반되는 이세돌만의 독특함, 이것도 역시 이세돌답다.
대국 진행을 맡은 한국기원 측도 비상이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비행기표 점검에 숙소에서 공항까지의 교통편 체크는 물론이고 재입국에 필요한 비자발급 및 각종 서류 점검 등 손봐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국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태이니 어떤 비행기를 타야할지도 모르는 일. 행여나 일생의 가장 화려한 잔치에 문제가 생기게 할 수도 없는 노릇.
▲ 이세돌과 동갑내기 여자친구 김현진 씨. 그는 혼기가 꽉 찬 선배 이창호를 제치고 먼저 결혼에 골인한다. | ||
‘4도시 소년소녀 대항전’이라는 아마추어대회가 있다. 부산 베이징 타이페이 도쿄를 대표하는 어린이 5명 간의 단체 대항전으로 한국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영성 전 한국기원이사가 후원했던 대회다.
1993년에 창설된 이 대회는 부산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당시 한국은 주장에 최철한(현 國手)에 이강욱(현 프로초단), 권효진(현 프로5단)에 지금은 아마강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윤춘호 김정수 등이 선수였다.
일본은 현재 NHK에서 바둑진행자로 유명한 미녀기사 만나미 카나 3단이 주축멤버였으나 실력면에서는 아무래도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서는 열세였다.
하지만 중국은 대단하다. 이창호 킬러로 유명한 현 중국 랭킹 4위 후야오위, 대마왕 치우진, 신인왕 출신 황이중 등 그야말로 초호화멤버였다.
프로세계대회 주니어판급 중국선수들은 일본과 대만을 5-0으로 일축하고 최철한이 이끄는 한국에도 3-2로 이겨 초대 우승컵을 차지하였다.
부산에서 대회를 마친 중국팀은 총무로 방한했던 <위기천지(圍棋天地)> 이철용 기자의 주선으로 한국의 명문바둑도장인 권갑용 도장을 방문하여 교류전을 가졌다. 한국선수 중 김정수를 제외한 네 명이 모두 권갑용도장에서 공부하는 선수였으니 한국팀 입장에서 볼 땐 일종의 복수전이었던 셈이다.
어린이였지만 실력이 거의 프로급 선수들이었기에 바둑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한 시간쯤이나 흘렀을까. 대국실에서 후야오위가 나왔다. 화장실을 가는 모양이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고 이마에서는 진땀마저 흘리고 있었다.
대국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철용 기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 기자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후야오위. 나지막히 속삭인다.
“아저씨, 저 이렇게 쎈 아마추어는 처음 봤어요. 도대체 판이 되질 않아요.”
“그래? 4도시 선수로 나왔던 애는 아니니?”
“네, 아니에요. 처음보는 앤데 바둑이 엄청나게 쎈 데다가 어찌나 빨리두는지 정신을 못차리겠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대국장으로 들어간 후야오위. 결국 10분도 지나지 않아 돌을 던지고 대회장을 빠져나왔다.
의기양양하게 뒤따라 나오는 어린이. 짙은 눈썹에 총명해 보이는 까만 눈동자. 갸날픈 몸에 비해 유달리 큰 손. 프로급 강자를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이 간단히 꺾어버린 열 살짜리 꼬마 고수. 바로 ‘이세돌’이었다.
후야오위는 귀국 후 바로 프로 입단에 성공했고 이세돌은 2년 후 당시 역대 최소 3위에 해당하는 12세의 나이로 프로에 입문했다.
이세돌은 지금도 중국바둑계에 있어서는 이창호에 버금가는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럴 때 생각나는 속담 ‘병아리 때 쫓긴 닭, 장닭 되어서도 쫓긴다’ 아닐까.
정동환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