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김상석 기자 | ||
아드보카트 감독은 한 달 보름 정도를 종이와 컴퓨터만 가지고 도상 훈련에 의존해야만 한다. 이런 여유(?)를 히딩크 감독은 갖지 못했다. 아니 여유라기보다 계속해서 선수들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아드보카트 감독은 그러지 못하고 초조한 시간들을 보내게 된 것이 조금 아쉽다. 전지훈련의 결과가 전체적으로 좋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오히려 5 대 0이란 스코어로 한 번 깨져 보고 진정으로 자숙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은 것일까?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대회에서 프랑스에 5 대 0에 이어 체코와의 친선 경기에서 또 5 대 0. 실로 참담한 순간에 히딩크 감독은 희한한 각론의 분리 연습이란 방법을 채택했다. 한 번의 기습에 배후를 내주는 창호지 수비를 보강하기 위해 8, 9월 두 달간은 오로지 수비라인의 구축에만 시간을 할애했다. 미드필더들과의 간격 유지를 철저히 연습하되 최전방과 최후방의 거리를 30~35m로 잡고 마치 공격-미드필드-수비가 하나의 인쇄판(printing plate)처럼 움직이도록 만드는 데 상당한 결실을 보았다. 이것이 그간 오랫동안 고착화되어 왔던 스위퍼 시스템과의 영원한 결별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연말까지는 미드필드진과 공격진의 유기적 연결 및 플레이메이커 또는 창의적인 공격형 미드필더를 개발해 내는 데 주력했으나 결국 이 실험은 이듬해 우루과이전 때까지 계속되는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다음 2002년 초 유럽전지 훈련 막바지에 히딩크 감독은 수비형 미드필더로서의 탁월한 잠재력을 보유한 김남일을 발견했고 윤정환의 공격형 미드필더로서의 기량도 동시에 확인했지만 히딩크식 토탈 풋볼에 맞지 않았던 탓에 벤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대전을 통해 다양한 공격루트의 개발을 최종적으로 시험하고 대표팀의 전력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것으로 본선 개막일을 맞이했었다.
이상에서 보면 축구도 마치 우리가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것처럼 포메이션의 부위별로, 즉 각론을 따로따로 학습하고 연마해 나가는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개개의 선수 포지션까지를 확정시키기 위한 갖가지 노력들까지 감안한다면 당시 히딩크 감독과 코칭스태프들이 얼마나 힘든 수험 준비를 해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아드보카트 감독 | ||
2001년 12월 제주도에서 유상철이 플레이 메이커로 연습하는 것을 보고 히딩크 감독에게 괜찮겠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당시 히딩크 감독 왈 “상철이야 어디 세워 놓아도 잘 하는데 딱히 어디 한 자리를 주자니 어렵고 말이야…허 참….” 멀티플레이어를 그렇게 강조해 놓고도 막상 진용을 짜자면 이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거기다 기어변속용으로서만 차두리를 활용하겠다는 제한적 용병술이나 최용수와 이동국을 놓고 마지막으로 고민하던 날의 긴긴 밤 등 지나간 이야기지만 아슬아슬하던 숱한 에피소드는 전화번호부만한 책을 쓰고도 남을 것이다.
현재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의 경우도 이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포메이션과 포지션의 두통거리는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2002년 당시 해외파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해외파라 하더라도 소속팀에서 확고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과 같이 해외파와 국내파, 해외파간 자리 경쟁이 이토록 치열한 상황에서는 코칭스태프들의 선택의 폭이 너무 커져 정말이지 고민 아닌 고민거리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5월에 들어서면 더 이상 원론적인 실험은 불가능하다. 제대로 잘 다듬은 최종 전투 계획서가 나오기를 빈다. 94년 미국 월드컵대회에 루드 훌리트가 나왔다면 네덜란드가 브라질을 이길 수 있었을 거라든가, 2002년 아르헨티나가 3-3-1-3 일변도의 포메이션 때문에 예선탈락 했다든가 등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려면 이번 봄에 노트 정리를 잘 해야 된다. 시행 착오에 대한 교정은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별로 없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 미디어 담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