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열린 피스컵 대회에서 레알 소시에다드 소속으로 뛰었던 이천수. 그는 스페인에서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국내로 복귀했다. 사진제공=세계일보 | ||
바로 얼마 전 비에리(AS 모나코)와 안정환(뒤스부르크)은 월드컵 대표팀의 합류를 보장받기 위해 갑자기 팀을 옮겼다. 이는 팀의 선택이라기보다 자신의 몸값을 제대로 받기 위한 선수 스스로의 자발적 행위로 보는 것이 옳다. 여하튼 월드컵은 4년에 한 번 치르는 축제지만 클럽은 매일같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보니 어떤 클럽에 속하느냐에 따라 선수들의 인생은 천차만별로 변화무쌍한 희비쌍곡선을 그리게 된다. 박지성과 이영표 이야기는 이제 질릴 만도 하니 다른 이야기를 좀 하자.
대개 클럽이 선수를 영입할 때는 비게 되는 공간에 누구를 넣느냐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무조건 기량이 출중하다고 해서 다 데려가는 것은 아니다. 요는 선수가 이적할 때 자신이 과연 거기서 주전을 확보 받을 수 있느냐가 최대의 관심사이며 그 예상이 어긋날 때는 팀이나 선수에게 치명적인 손해가 초래된다.
뉴캐슬보다 훨씬 부자 구단인 맨유는 유로 1996의 영웅 알란 시어러를 영입할 수도 있었지만 탐내지 않았다. 결국 맨유는 프랑스 출신이자 맨유의 전설로 뜬 에릭 칸토나의 마지막 저력에 힘입어 96~97 시즌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뉴캐슬은 어떠했을까. 시어러를 데리고 있으면서도 유럽 챔피언스리그나 UEFA컵 대회에서 강한 임팩트를 주지 못하고 늘 정체선상에 머물러야 했다.
반대로 98 프랑스월드컵 이후 첼시로 이적한 덴마크의 브리안 라우드럽은 환상적인 플레이로 일찍 자리매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수가 넘쳐 나 팀의 균형이 서질 않는다며 스스로 첼시를 떠났다.
이천수가 월드컵 이후 레알 소시에다드로 갈 땐 사실 노쇠한 러시아의 카르핀이나 터키의 니하트 자리가 빌 것을 예상하고 간 것이었다. 그러나 웬걸! 두 선수가 너무나 확고한 위상을 점하고 있던 터라 곧바로 표류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다. 이것은 운이 따르지 않는 케이스다.
▲ 2002 월드컵에서 뛰었던 모리엔테스. | ||
그렇다면 무조건 아무 포지션이나 소화할 수 있고 다재다능한 플레이어가 좋은 걸까. 히딩크 감독은 멀티플레이어를 강조했다. 그러나 멀티플레이어를 모든 클럽에서 환영하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레알 마드리드의 라울은 이 팀에 계속 머무는 것은 연고지와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도 있지만 그의 스타일을 딱히 원하는 클럽이 많지 않기 때문에 소속팀에서 슬럼프에 빠질 때도 아무런 이적설이 나돌지 않았다. 그 이유는 라울이 전형적인 센터포워드(반 바스텐 or 바티스투타)도 쉐도우 스트라이커(바지오 or 히바우두)도, 그렇다고 윙포워드(로벤 or 앙리)도 아닌 어정쩡한 공격수라는 점이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보면 이적시 가장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는 것은 해당 클럽의 포지션을 점유한 기존 선수와의 경쟁이다. 유로96에서 세계적 윙으로 발돋움한 체코의 포보르스키는 맨유로 이적해 오른쪽 날개 자리를 따내는 듯했다. 한데 당시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베컴과 자리 경쟁을 펼쳐야 했다. 포보르스키는 상당히 위협적인 득점 능력과 수비라인 돌파 능력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크로스를 날리는 베컴을 누르지 못했다. 만약 이 경쟁에서 포보르스키가 이겼다면 21세기 벽두의 세계 축구사는 다시 쓰여 졌을지 모른다. 포보르스키는 그후 벤피카와 라찌오를 전전하다 별다른 인상을 심지 못한 채 모국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뒤스부르크로 이사한 안정환은 별다른 팀 내 경쟁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른 득점에 실패(지금까지 겨우 어시스트 하나)한 나머지 이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실패작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다. 독일로 오는 것은 아주 약은 판단이었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클럽에서의 성적이 그 모양이니 대표팀 주전을 꿰차기도 영 시원찮아 보이지만 다행히(?) 이동국이 중도하차하는 통에 이래저래 엔트리에는 오를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질긴 생명력도 선수로서 장기라면 장기다.
이제 월드컵이 끝나면 곧바로 2006~2007 시즌이 시작된다. 지금까지는 안정감을 확보한 이영표나 박지성이 어떠한 경쟁의 도전에 직면할지 알 길이 없다.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는 맨유와 재계약을 끝냈다. 따라서 박지성이 팀 내 가장 버거운 경쟁자보다 우위에 서려면 지금보다 양질의 고공 크로스와 득점력을 보강하는 일이다. 아, 물론 이번 월드컵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최소한 한 시즌을 보장받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축구 선수의 인사 이동만큼 살벌한 인사가 또 있을까. 샐러리맨들이여 초조해 하지 말라. 축구 선수가 받는 스트레스는 훨씬 더하니까 말이다.
2002월드컵대표팀 미디어 담당관 및 주 독일대사관 참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