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무적함대 스페인의 수문장 호세 산티아고 카니사레스(33·발렌시아). 그는 4년 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대표팀에 발탁되긴 했어도 후보 골키퍼로 벤치만 지키다가 팀이 16강에 오르지 못하는 바람에 실전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절치부심 4년을 기다린 끝에 맞은 2002한일월드컵. 드디어 주전 골키퍼로 월드컵 무대에 처음 서게 될 기대로 잔뜩 부풀었지만 한국으로 떠나기 불과 5일 전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한 후 얼굴에 로션을 바르다 화장품 병이 발등에 떨어지면서 발 근육에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된 것. 눈물을 머금고 대표팀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카니사레스는 대신 참관인 자격으로 목발을 짚은 채 지난 21일 스페인 선수단과 함께 입국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별 사비올라(19·바르셀로나). 그는 지난해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마라도나에 버금가는 대활약으로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끌어 MVP를 수상했는가 하면 그 여세를 몰아 스페인의 세계적인 명문구단 바르셀로나에 입단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절정기의 골 감각을 보여주고 있어 월드컵 엔트리 합류를 의심하지 않고 있다가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이 “큰 경기에는 경험 많은 선수가 필요하다”며 사비올라 대신 36세의 노장인 ‘바람의 아들’카니자를 선택하자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일본 대표팀의 활력소라 불리던 나카무라 순스케(24)의 최종 엔트리 탈락도 관심을 끈다. 그로 인해 일본에서는 대표팀의 평가전 연패와 함께 트루시에 감독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는 상태. <닛칸스포츠>의 여론조사에서도 86%의 지지를 받은 나카무라를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시킨 트루시에는 대신 별다른 활약이 없는 노장선수 나카야마 마시시를 선택했다. 그러자 언론과 축구팬들이 크게 반발했고 5월 중순 유럽에서 홀로 돌아온 트루시에 감독이 나리타 공항의 비상출입구를 통해 몰래 빠져나올 만큼 분위기도 험악해졌다.
튀니지의 주전 미드필더인 오사 셀라미는 최종 엔트리에 끼어 일본까지는 잘 갔으나 지난 5월18일 연습경기 중에 새끼발가락 뼈가 골절돼 그토록 원하던 월드컵 무대를 눈앞에 두고 쓸쓸하게 홀로 귀국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밖에도 너무나 많은 축구 스타들이 이번 월드컵을 뒤로 해야만 했다. 부상당한 잉글랜드의 제라드, 아일랜드의 마크 케네디, 벨기에의 에밀 음펜자, 독일의 노보트니와 다이슬러가 빠져야만 했고, 기량은 출중하지만 성실하지 못해 월드컵호에 승선하지 못한 프랑스의 아넬카도 축구팬 입장에서는 아쉽기만 하다.
그런데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선수는 수원 삼성의 데니스다. 1차로 27명을 선발한 러시아의 대표선수 명단에 당당히 올라 지난 5월 중순 모스크바에서 열린 LG컵대회에 참가했던 데니스는 벨라루시공화국과의 경기에서 페널티킥까지 유도해내는 활약을 펼쳤고 무엇보다 러시아와 같은 조에 속해 있는 일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선수라 무난히 대표팀에 선발될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유명한 선수 위주로 대표팀을 구성하는 로만체프 감독의 선발 방침에 따라 23명의 최종 엔트리에선 빠지고 만 것. 한국 프로축구 사상 처음으로 현역 용병의 월드컵 출전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데니스가 선발되어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면 한국 프로축구의 위상이 올라갈 뻔했는데 아쉽다.
월드컵 뒤에는 이렇게 ‘꿈을 이루지 못한 선수들’의 진한 아쉬움과 탄식이 짙게 드리워 있다.
KBS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