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아드보카트 감독은 여유를 갖고 팀을 조각했던 히딩크와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 ||
좀 미안하지만 전반 45분은 이 대회 최악의 45분이었다. 옛날 우리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압박과 지배는 완전히 실종되고 어떻게 경기를 풀어갈 건지 미궁 속에 빠진 45분이었다. 여기까지 보면 역시 아드보카트는 히딩크보다 한 수 아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후반은 전반의 결함을 완전히 혁파했다. 이천수가 오른쪽으로 빠지고 이영표의 전형적인 오버래핑이 다시 빛을 보자 박지성의 올라운드 플레이가 수비진을 헤집기 시작했다. 후반 안정환의 투입은 당연한 공격보강이었다. 특히 두 번째 안정환의 골은 우리의 공격수들이 서로 엇갈리게 방향을 틀면서 토고 수비진을 멋들어지게 흩트려 놓았다는 점에서 전술적 쇄신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후반부 이을룡과 교체된 김남일이 중원의 템포를 조율하게 한다던가, 선수들 모두가 전체적으로 경기의 완급조절을 원만히 한 부분 등은 높이 살 만하다.
토고는 사실 ‘팀플레이’가 없는 ‘무조직의 조직’이었다. 공격은 단 두 명, 그러다보니 미드필더들과의 간격은 엄청나게 벌어져 있었고 우리가 재빠른 수비전환으로 압박을 가하면 볼은 항상 우리에게로 되돌아 왔다. 이런 개인기 위주의 팀을 상대로 첫 골을 내주었다는 것이 호되게 비난을 들어야 할 점이다.
▲ 토고전에서 역전골을 날리는 안정환. 연합뉴스 | ||
그런데 특히 요사이 전 세계 축구 언론의 이상한 습관 중 하나가 교체 선수가 득점을 하거나 어시스트를 하면 ‘What a substitution!’이라고 광분한다는 점이다. 교체의 시점 등을 제대로 결정하는 것은 물론 감독의 자질에 달려 있으나 골을 넣는 것은 결국 선수 자신이지 않은가. 대일본전에서 히딩크가 교체시킨 팀 케이힐이 득점할 때나, 안정환이 결승골을 넣을 때면 꼭 역시 저 선수가 넣는구나가 아니라 감독의 용병술이 탁월하다고 지레 결론지워 버리고 만다. 케이힐은 결코 깜짝 스타가 아니다. 대회 직전 국가대표 경기 14번에 8득점이었고 지난 시즌 프리미어 리그 에버튼의 득점왕이자 팀의 시즌 최우수 선수였다. 안정환 역시 이동국이 없는 상황에서는 조재진의 고정 대체 또는 불가피한 교체일 수밖에 없다. 특별한 용병술이 아니다. 어차피 23명의 최종 엔트리란 11개의 포지션에 정·부를 두는 시스템 관리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정말로 환상적인 용병술은 선수의 포지션, 또는 포지션과 선수의 기능 변화까지를 염두에 둔 전술이다. 히딩크는 98년 우리를 무참하게 짓밟을 때 원래 미드필더 또는 공격형 미드필더인 코쿠를 센터포워드로 썼다. 이 기발하고 희한한 아이디어가 효과를 보았고, 이후 코쿠는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 설 수 있는 선수가 되었다.
▲ 히딩크 감독 | ||
히딩크는 선수 교체로 재미를 보는 식의 장기는 별로 없었다. 그런 재주로는 브라질의 스콜라리가 단연 선두일 것이다. 오히려 히딩크는 경기의 시작과 끝을 조직화하는 능력에 있어 단연 세계 최고수의 반열에 오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전략의 하위개념인 전술을 전개하는 데 있어 마치 11명의 이동경로를 하나의 건축학적 구조로 총화시키는 습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포메이션이나 시스템의 노예가 되지도 않으면서 선수들의 유연하고도 확실한 기능분담을 조화시키는 역량을 발휘해 왔다. 그걸 사람들은 ‘매직’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럼 아드보카트는 히딩크처럼 매직을 실현하는 감독인가. 나는 그건 아니라고 본다. 히딩크는 전혀 다른 대표팀을 만들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으나 아드보카트는 얼마 안 되는 기간에 슬럼프의 한국을 자기 자신의 팀으로 거듭나게 해야 했다. 이 경우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것은 일단 찔러보고 안 되는 것은 재빨리 처방을 가하는 신속한 임기응변이다. 3-4-3에서 4-2-3-1로의 전환, 선수들의 타성적인 움직임까지를 감안한 공격라인의 과격한 변화 등이 그 한 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아드보카트의 특징을 찾아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토고전은 그러한 그의 장점과 습관이 드러나는 대표적 경기였다. 아드보카트는 별로 잘난 체 하지를 않는다. 옛날 학교 다닐 때 썩 수재는 아닌데 기말고사 때면 성적을 잘 받는 친구가 있었다. 시험에 운이 좋은 게 아니고 틀린 문제를 왜 틀렸는지 잘 생각해 보는 친구였다. 그는 그런 친구인 듯하다.
스위스전도 기대해 보자.
2002 한일월드컵 미디어 담당관
현 독일대사관 참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