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현수의 아버지 안기원 씨는 지난 가족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그의 옆으로 보이는 가족사진이 새롭다. | ||
현수가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어떤 남자가 전화를 걸어선 대뜸 현수 엄마를 바꾸라고 했다. 마침 현수 엄마는 시장에 가고 집에 없었다. 아내의 부재를 전하자 그 남자는 대뜸 “돈을 빨리 갚지 않으면 가만 안 두겠다”며 협박을 하곤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중에 현수 엄마를 앉혀 놓고 자초지종을 물어보니까 가게를 운영하다가 돈이 필요해서 사채업자로부터 3000만 원을 빌렸다고 했다. 그 즉시 난 3000만 원을 아내에게 건네주고 빨리 해결하라고 독촉했다.
그로부터 한 1년 정도 흐른 뒤였다. 갑자기 집으로 사채업자들이 들이닥쳤다. 이미 아내는 도망친 상황이었다. 사태를 파악해보니 아내가 사채업자들로부터 빌린 돈이 자그마치 8억 원 정도 됐다. 원금보다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서 생겨난 액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쇼트트랙을 하는 학부모들한테도 돈을 빌렸는데 ‘줄줄이 사탕’이었다. 사업을 하느라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나는 도망친 아내를 대신해서 뒷감당을 해야만 했다.
내가 하던 봉재·부자재 일이 당시만 해도 큰 이익을 남기고 있어 상가와 여러 채의 집을 마련해 둘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재산들이 대부분 사채업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12년 전에 5억 원 정도의 빚잔치를 해야 했으니 나의 상실감은 표현 못할 지경이었다.
아내가 도망을 갔지만 난 남겨진 두 자식들을 키워야 했으며 더욱이 스케이트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현수를 뒷바라지해야 했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희망도 보이지 않았고 불행만이 내 인생을 휘감고 있는 듯했다. 결국엔 여동생 집으로 들어가게 됐다. 사업을 하면서 아이들을 챙기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3년 동안 여동생 신세를 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날 정도다.
사위를 용서하신 계기는 피를 나누지 않은 현수 때문이었다. 현수가 올림픽 국가대표에 뽑혀 국제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 이름을 알리자 장모님이 조금씩 관심을 보였고 아무리 문전박대를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처갓집에 들러 욕을 먹고 돌아서는 사위가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은 지난날의 앙금을 깨끗이 털고 사위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시며 사랑을 아끼지 않으시는 진짜 장모님이 되셨지만 결혼과 사위로 인정받게 된 과정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새엄마를 맞이한 현수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숨어 지냈던 친엄마가 학교로 찾아오고 전화를 거는 등 자꾸 주변에 등장하자 조금씩 방황하기 시작했다. 딸 현숙이도 처음엔 ‘아줌마’ 하면서 잘 따르다가 친엄마를 만난 이후 태도가 달라졌다. 결국 현숙이는 친엄마와 함께 살겠다고 졸랐고 친딸처럼 정성을 다 쏟았던 현숙이가 친엄마에게 간다고 하자 아내는 큰 상처를 받기도 했다.
현수 엄마 또한 재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았기 때문에 현숙이는 오래 버티질 못했다. 결국 2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주위에서 현숙이가 어디 갔냐고 물으면 이런 속사정을 털어 놓지 못하고 그냥 유학 보냈다면서 말을 아꼈다.
지금의 아내에게 고마운 건 현수 뒷바라지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사실이다. 세 살 터울의 현민이 현준이를 낳은 뒤에도 갓난 아기를 들쳐 업고 세 살 난 아이를 손 붙잡고 다니면서 현수를 위해 하루도 빠짐 없이 링크장을 오갔다. 현수가 사춘기를 겪는 것 같으면 엄마이기 전에 인생 선배로 상담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난 토리노 동계올림픽을 앞두고는 집 근처의 절에 찾아가 100일 기도를 올렸다. 이런 정성에 나보다 현수가 더 감동했다. 낳은 정도 중요하지만 기른 정 또한 중요하다는 게 현수의 생각이고 나보다 더 엄마를 좋아하는 현수를 볼 때마다 지난날의 아픔이 애잔하게 밀려들곤 한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