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기현의 어머니 김영자 씨는 성공한 아들을 두고도 결코 자식에게 기대 살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자꾸 몸이 아픈 게 서럽다고. | ||
만약 내가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소개되지 않았다면 우리 옆집 사는 사람들조차 내가 누구의 어머니라는 걸 몰랐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유명해진 강릉 중앙시장에서도 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난 그저 과일 장사 아줌마에 불과했다. 그러다 아들이 유명해지면서 나까지 덩달아 매스컴을 타는 바람에 이젠 옆집 사람은 물론 내가 모르는 사람들조차 내 신상 명세를 훤히 꿰고 있게 됐다.
얼굴이 알려지니까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장사를 했을 때는 물건 값 깎는 손님과 실랑이를 벌일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설기현 엄마가 구두쇠’라는 소문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 점도 있다. 어딜가나 우리 기현이를 응원하고 좋아해주는 고향 팬들이 많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기현이가 외국 생활을 하고 아들 3명이 모두 안산에서 살고 있는 마당에 굳이 내가 강릉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결혼하지 않은 두 아들을 위해 강릉을 떠나려 할 때 기현이가 강하게 만류했었다. 나까지 강릉에 없으면 고향을 자주 찾아보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현이 판단이 옳았다. 고향을 지키는 사람은 있어야 했다.
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 언니가 한 분 있고 내 밑에 남동생이 있다. 그런데 이 남동생이 날 자꾸 눈물짓게 한다. 동생은 거동이 불편하다. 나이가 마흔 살이 넘었는데도 장가조차 못 갔다. 장애가 있다 보니까 결혼을 생각지도 못할 처지다.
부모도 안 계시는 상황에서 그 남동생을 돌보는 몫은 내 차지가 됐다. 언니는 형편이 안 되는 탓에 내가 동생을 돌봐야 하는데 이렇게 허리가 아프고 자꾸 ‘잔 고장’이 나다 보니 나이 먹어가는 동생을 챙기기가 여간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걱정이 든다. 나마저 없으면 동생을 누가 챙길지….
난 자식 신세 지는 게 싫다. 기현이뿐만 아니라 다른 아들들에게도 손 내밀고 의지하고 싶지 않다. 마음은 기대고 의지해도 물질적으로는 ‘독립군’이 되려하는데 현실이 그걸 허락하지 않아 서글프다.
내가 죽기보다 더 싫었던 것이 ‘대물림’이었다. 가난은 물론이고 남동생을 돌보는 몫이나 또 다른 부분들까지 짐이 될 만한 것들은 자식들에게 대물려 주고 싶지 않았다. 장가 못간 두 아들도 내 손으로 결혼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앞으로 10년은 더 일해야 하는데 몸이 아프다보니까 답답증과 서러움만 복받친다. 내가 이런 생각하는 걸 알면 기현이가 또 한 소리 할 것 같다. 쓸데없는 걱정만 한다고. 그래도 부모 마음은 그렇지 않다. 팔 다리가 조금이라도 멀쩡하다면 자식한테 손 내밀지 않고 내 힘으로 살고 싶은 법이다.
난 기현이가 얼마를 버는지도, 또 얼마를 모아놓은지도 모른다. 아니 관심도 없다. 기현이 엄마로서 있을 뿐, 기현이의 수입에는 전혀 손대고 싶지 않다. 그래도 가끔은 벨기에로 가면서 선물한 이 집이 없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는 ‘우리 형편에 웬 아파트?’ 싶었는데 기현이가 무리해서 일을 낸 게 나한테 큰 도움이 됐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 키워서 아파트 한 채 선물받고 살면 행복한 거 아닌가? 더 이상 바라면 ‘욕심’이란 생각이 든다.
여자 혼자 자식 넷을 키우다보니 성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웬만한 남자 못지 않은 강심장도 가지고 있다. 겁나고 두렵고 놀라운 일도 없다. 그저 자식 잘 되는 것 하나에 내 모든 열정을 바쳐왔다. 그래도 사람이다보니 힘들 때가 있다. 가슴 저리도록 마음이 아플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면서 위로받고 위로해주며 푼다. 노래도 제법 한다. 언젠가 우리 아들 기현이 앞에서 노래 솜씨 좀 뽐내야겠다. 엄마가 마이크 잡고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면 아마 기절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현이가 귀국하면 꼭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 엄마의 사연이 담긴 노래를….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