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세리의 아버지 박준철 씨(오른쪽)와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 씨가 대전 유성에서 유쾌한 만남을 가졌다. | ||
지난해 <일요신문>에 연재된 ‘별들의 탄생 신화’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자로 묘한 인연을 맺은 박준철 씨(박세리 아버지)와 박성종 씨(박지성 아버지). 스포츠 스타의 아버지란 공통점 외에도 너무나 닮은 데가 많은 ‘양박(朴) 아버지’들은 이른 저녁부터 새벽까지 유쾌하고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평소 박세리의 아버지 박준철 씨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 씨. 박준철 씨를 잘 알고 있는 지인을 통해 만남을 요청했고 박준철 씨는 흔쾌히 유성에서의 저녁 식사에 박성종 씨를 초대했다. 가벼운(?) 뷔페에서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운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지면으로 재구성해본다.
박성종(성): 이렇게 뵙게 돼 정말 반갑습니다. 한 번쯤 꼭 직접 뵙길 바랐는데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네요.
박준철(준): 어휴 무슨 말씀을 하세요. 나 또한 박지성이란 훌륭한 선수를 성장시킨 부모가 어떤 분인가 아주 많이 궁금했어요.
성: 말씀 놓으세요. 저보다 한참 위시잖아요.
준: 처음 뵙는 자린데요. 그나저나 요즘 박지성 선수가 부상에서 회복돼 경기에 뛰고 있다구요?
성: 소식 들으셨어요? 부상으로 마음 고생 많았는데 지난 연말부터 그라운드로 돌아와 다행이에요.
준: 자식이 아픈 건 말로 표현할 수가 없죠. 세리도 지난해 손가락 부상으로 아예 골프채도 잡지 못했거든요.
성: 전 박세리 프로를 영국에서 한 번 봤어요. 지난해 브리티시오픈대회 때 구경 간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박 프로에게 사인도 받았어요.
준: 그래요? 세리에게 지성이 아버지라고 얘기하셨어요?
성: 제가 직접 하진 않았구요, 다른 기자가 대신 전했는데 박지성 사인을 받고 싶다고 얘기했다고 하더라구요.
준: 좋은 일이에요. 우리나라 선수가 외국에 나가 열심히 뛰고 좋은 성적을 내는 건 정말 진심으로 축하하고 격려해 줄 일이에요. 전 세리가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 너무나 막막했어요. 믿고 의지할 만한 선배도,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세리가 미LPGA 무대에 발 내딛을 때마다 모든 게 ‘처음’이었고 모든 게 ‘역사’로 기록됐죠. 거기다 메이저대회인 US오픈대회에서 우승까지 했으니 정신이 없었죠.
▲ 박지성(왼쪽)과 박세리. | ||
준: 전 개인적으로 박지성 선수의 눈이 마음에 들어요. 눈을 보면 굉장히 강렬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게 되거든요. 분명 지금보다 더 업그레이든된 선수가 될 거예요.
성: 그러고보니 박 프로 쪽이랑 종교도 비슷하네요. 이렇게 말씀 드리면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들이 욕 먹는 것도 비슷해요. 너무 나선다는 비난을 종종 듣잖아요.
준: 난 이제 그런 시각들, 기사들에선 초연해졌어요. 나처럼 욕 많이 먹은 아버지도 없을 거예요. 세리가 한창 잘나갈 때 미국 타임지에 ‘갱스터의 딸’로도 기사화될 만큼 내 지난 과거들 때문에 세리가 많이 힘들었죠.
성: 제가 다르게 본 부분이 바로 그 점이에요. 박 프로 아버님은 오히려 솔직하게 모든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부러웠어요. 전 지금도 욕 많이 먹어요. 애비가 넘 나댄다고. 지성이도 가끔은 기자들 전화도 받지 말라고 얘기해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또 아예 무시하고 있으면 거만하다는 얘기가 나와요. 얼마 전에는 한 방송국에서 설기현과 맞붙는 레딩전에 저더러 스튜디오에 나와 해설을 해달라는 부탁을 해오더라구요. 당연히 거절했지만 만약 응했다면 난리가 아니었을 거예요. 네티즌들이.
준: 지성이 아버지도 과도기에 있는 거예요, 지금. 나처럼 많은 세월을 보내고 나면 그때, 그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죠. 난 유성이란 지역적 특수성과 내 과거 때문에 참 많이 힘들게 지냈어요. 도와달라고 손 벌리는 사람들이 집에 줄을 서서 기다렸어요. 빈손으로 돌려보내면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욕을 하고 돌아가요. 갖은 요구 조건과 압박과 시달림 속에서도 난 흔들리지 않았어요. 세리가 있었기 때문이죠.
성: 대단하시네요. 저흰 지성이가 네덜란드에 있을 때만 해도 별다른 수입이 없었어요. 워낙 세금이 세다 보니까 언론에 보도된 몸값과는 큰 차이가 있었죠. 프리미어리그 진출해서야 ‘축구를 해서 돈을 벌고 있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가 됐어요. 생전 전화 한 통 없던 친척들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선 ‘돈 빌려 달라’고 할 때가 제일 괴롭더라구요. 그리고 그건 제 돈이 아니잖아요. 지성이 돈이고 또 잘 모아서 지성이가 은퇴 후에 기반을 잡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잖아요.
준: 맞습니다. 세리나 지성이 정도 되면 국가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어야 해요. 지금의 자리에 혼자만 노력해서 올라간 게 아니잖아요. 전 요즘 자주 세리에게 사명감과 책임감을 강조해요. ‘골프 여왕’이란 타이틀은 아무나 얻는 게 아니잖아요.
성: 지성이는 아직 그 수준까진 안 되구요. 올해 후기리그를 어떻게 잘 마무리하느냐가 일단 중요해요. 또 다시 새해를 맞으니까 이젠 지성이도 장가를 갔으면 싶어요. 축구를 하는 만큼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 또한 어려운 것 같아요.
준: 지성이 나이에 벌써 결혼을 걱정하다니… 나이가 ‘계란 한 판’인 세리 아빠는 그냥 죽어야겠네 하하하. 그나저나 세리와 지성이의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지? 요즘은 연상도 괜찮은데 하하.
성: 나중에 두 사람 스케줄이 맞으면 편하게 만남의 자리를 주선해야겠어요. 물론 누나 동생 사이로 말이죠. 지성이가 외동아들인데 누나가 생기면 아주 든든할 것 같아요. 그것도 ‘골프 여왕’ 누나는 막강하잖아요.
오랜 시간 동안 저녁을 먹으며 얘기를 나눈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겨 술자리에서 더욱 속 깊은 대화를 더 나눴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 헤어진 두 사람의 호칭은 ‘박 프로 아버지’ ‘지성이 아버지’가 아니라 어느새 ‘형님, 동생’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