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에 이어 종합격투기 K-1에서도 ‘테크노 골리앗’의 위용을 자랑하는 최홍만(27). 그리고 ‘돌연변이’ 아들로 인해 말 못할 마음 고생을 겪었던 아버지 최한명 씨(59). 2007년 새해 처음 소개되는 ‘부모가 쓰는 별들의 탄생 신화’는 최홍만의 아버지 최한명 씨의 뒷바라지 스토리로 문을 연다.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고민이 많았다. 아들을 앞세워 아버지가 이런 저런 얘기를 털어 놓는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고 살아갈수록 ‘최한명’이란 내 이름보다는 ‘홍만이 아버지’로 더 유명해진 상황에서 뒷바라지 운운하며 뭔가를 말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 홍만이를 가까이 접할 수 없는 팬들에게 내 얘기가 조금이라도 홍만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데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을 했고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됐다.
▲ 최홍만의 유치원 시절. 그는 어렸을 때만 해도 남들과 비슷한 체격이었다고 한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최홍만. | ||
‘저 녀석이 훈련은 언제하고 저렇게 노래 연습을 했지?’하는 걱정과 우려와 기대감 등등이 복잡하게 얽혀 돌아갔다. 처음엔 래퍼가 뭔지도 몰랐다. 나중에 신문 기사를 보고 홍만이가 읊어댄 게 랩이라는 걸 알았다.
홍만이는 어렸을 때만 해도 ‘끼’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아이였다. 사람 많은 데 가는 걸 유독 싫어했고 유치원에서 단체 사진 찍는 것도 쑥스럽다며 도망다녔던 쑥맥이었다. 그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나로선 지금의, 아니 세상에 최홍만이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보였던 아들의 이미지는 너무나 생경스럽다 못해 잠깐 동안 ‘진짜 내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헷갈린다.
내가 ‘홍만이 아버지’로 유명해진 다음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홍만이가 태어났을 때 몇 ㎏이었냐?’하는 것이다. 이젠 여기서 대답하는 걸로 이 질문은 그만 듣고 싶다. 홍만이는 신생아치곤 상당히 많이 나가는 체중이었다. 4.6㎏! 병원에서 태아가 너무 크다면서 출산 때 산모의 고통이 엄청날 거라고 겁을 줄 정도였고 나중엔 아기와 산모, 둘 중 한 사람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할 만큼 홍만이는 뱃 속에서도 ‘거대아’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생아 때만 거대아였을 뿐 그후론 또래 아이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을 봐도 친구들과 어울려 보였지 튀거나 남다른 느낌을 주지 않았다.
홍만이가 본격적으로 키를 늘려간 시기가 고1 때부터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 키가 고1이 되면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늘어났다. 체격이 월등히 커지자 씨름부 코치가 홍만이에게 씨름부 가입을 권유하게 된다. 당시 마땅히 할 만한 운동이 없었던 홍만이는 재미삼아 씨름부에 가입했고 본격적인 훈련을 받으며 씨름에 재미를 느껴갔다.
고1 겨울 방학 때 부산의 동아대학교와 경원고등학교에서 제주시 한림읍 쪽에 전지훈련을 왔다. 한림공고 씨름부와 자연스레 연습 경기를 하게 된 경원고에선 다른 선수들에 비해 체격이 월등히 좋았던 홍만이를 눈여겨보게 됐고 당시 감독이었던 조태호 감독이 날 찾아오면서 홍만이의 씨름 인생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됐다.
조 감독은 무조건 홍만이를 부산으로 데려가서 제대로 된 씨름 선수로 만들겠다며 홍만이를 데려가게 해달라고 졸랐다. 홍만이의 장래에 대해 은근히 걱정이 많았던 난 조 감독의 제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훌륭한 선수로 키우겠다는 데 어느 부모가 싫어하겠는가. 부둣가에서 갈빗집을 운영하며 두 아들을 키운 우리 부부는 힘닿는 데까지 홍만이를 뒷바라지하겠다고 다짐한 뒤 그렇게 부산으로 홍만이를 떠나보냈다. 홍만이를 타지로 유학 보낸 아내는 밤새 끙끙 앓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처음으로 자식을 품 안에서 떠나 보낸 모정이 끊임없는 걱정들로 속을 태우게 했던 것이다. 덩치가 산 만한 씨름 선수가 부모한테는 여전히 ‘애기’였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도 홍만이를 ‘애기’라고 부른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