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미어리그 미들즈브러로 이적한 이동국. 프리미어리거 ‘토종 4호’의 활약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 ||
프로축구 모 구단 단장은 ‘K리그 거품론’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작심한 듯 말문을 열었다. “구단들은 1년 예산의 70% 가까이를 인건비로 씁니다. 나라 경제 사정과 K리그 수익 구조에 걸맞은 지출이 필요한데 현실은 반대입니다. 좀 재능있는 선수다 싶으면 수십억 원의 이적료를 주고 데려와야 합니다. 영입한 뒤에는 수억 원의 연봉을 줘야 하고요.” 잠시 한 숨을 쉰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솔직히 선수들의 몸값에 거품이 낀 것은 단장들 잘못입니다. 리그의 장기적인 발전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이익만을 좇아 무리한 지출을 하면서 거품을 만들었습니다.”
자책하듯 말하는 이 단장의 고백처럼 현재 K리그는 몸값 거품을 없애지 않으면 리그 전체가 위험에 빠진다는 위기 의식에 휩싸여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지난 16일 연맹 대의원총회를 열고 구단 지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연봉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샐러리캡(연봉총액제한제)을 도입해서라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몸값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을 나눴다.
K리그에 짙게 드리워진 위기의식의 근원인 선수들의 몸값 거품. 프로축구 관계자들은 거품 발생의 원인을 ‘경력 세탁’에서 찾는다. 에이전트나 선수들이 ‘태극마크’와 ‘외국물’을 들먹이며 몸값 인상을 주장하고 구단들이 이를 수용하면서 연봉 구조에 거품이 끼었다는 것이다.
# 태극마크의 위력
K리그의 한 에이전트는 최근 팀을 옮긴 대표 선수 출신 A를 언급하며 ‘경력 세탁’으로 인한 몸값 상승의 실례를 전했다. A는 2005년 K리그에 데뷔했다. 당시 그는 대표 경력도 없고 팀에서도 주전 자리를 꿰차지 못했다. ‘평범한 선수’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그는 소속팀 감독 덕분에 스타로 떠올랐다. 감독은 그의 가능성을 높이 보고 많은 출전 기회를 줬다.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대표팀의 미래를 이끌 선수”라며 그에 대한 칭찬을 했다. 대표선수를 배출하지 못한 그의 구단 역시 감독의 장단에 발을 맞추며 A 띄우기에 나섰다.
▲ 유럽 진출을 모색하다 K리그로 복귀한 안정환. 수원 삼성과 계약을 맺은 그는 구단과 K리그의 ‘흥행카드’로 꼽히고 있다. | ||
그러나 A의 에이전트는 선수가 뜨자 ‘대표 선수다운 대접’을 해달라고 구단에 요구했다. 2006년 연봉으로 전년도에 비해 100% 상승한 1억 원을 요구해 구단의 승낙을 얻어냈고 2007년 연봉으로는 100%가 또 인상된 2억 원을 요구했다. 구단은 에이전트 요구에 부담을 느꼈다. 구단 최고액 연봉자가 2억 원을 받는 상황에서 입단 3년차에 불과한 A에게 덥석 2억 원을 줄 수 없었다. 결국 구단은 A와의 계약을 포기했다.
이 구단 관계자는 A가 새로운 팀에서 ‘대표 선수다운 대접’을 받는다는 소리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A와의 계약은 올해 말까지였습니다. 지금까지 A의 에이전트 행태를 보면 분명 올해 말에는 3억 원 이상을 요구할 것 같았습니다. 난색을 보이면 ‘A를 원하는 구단이 줄을 섰다’며 협상 중단을 선언할 거고요. 이적료를 받을 수 있을 때 이적시키는 게 낫다 싶어 보냈습니다.”
최근 20억 원대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팀을 바꾼 B도 ‘경력 세탁’에 성공해서 대박을 터트린 선수다. 그의 이적료는 지난해 7월까지만 해도 10억 원이었다. 당시 그의 전 소속팀과 영입협상을 했던 모 구단 관계자는 “1년 사이에 B의 이적료가 배로 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7월 이후 대표팀에 들며 대표 출신이란 훈장이 붙은 게 이적료 상승의 원인인 것 같다”고 주장했다.
B의 이적을 지켜본 한 에이전트도 구단 관계자의 견해에 동의했다. “지난해 여름 B의 전 소속팀이 이적료 10억 원에 B를 보내기로 지방 모 구단과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B의 에이전트가 ‘선수가 지방에서 뛰는 걸 싫어한다’고 주장해 협상이 막판에 결렬됐죠. 그후 반 년 정도가 흐른 뒤 B는 23억여 원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결국 팀을 옮겼습니다.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뽑히면서 이적료가 급상승한 거죠. 1억 원대 초반에 머물던 그의 연봉도 배 이상으로 뛰었습니다. B에게 관심을 보인 구단이 세 팀이었는데 두 팀은 B의 계약 조건을 듣고 일찌감치 손을 들었고 그를 영입한 팀만이 ‘꼭 필요한 선수’라며 B의 요구 조건을 모두 들어줬습니다.”
▲ 프리미어리그 위건과 계약을 추진했던 이천수의 이적은 결국 무산됐다. ‘프리미어리거’의 길은 멀고 험하다. 왼쪽부터 이천수 이영표 박지성 설기현. 연합뉴스, 로이터/뉴시스 | ||
해외 진출도 ‘태극호’ 승선 못지않게 몸값을 올릴 수 있는 특효약이다. 최근 유럽에서 국내로 복귀한 C는 엄청난 몸값 상승을 기록했다. 외국의 클럽을 전전하면서 제대로 뛰지도 못했지만 20억 원대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귀향했다. K리그에서만 뛰었던 대표팀 동기들의 연봉이 제자리에 머문 사이 그는 1년 정도 외국에서 고생(?)하면서 확실하게 몸값을 올렸다.
C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외국에서 실패한 선수라도 국내에 복귀했을 때는 해외파란 ‘간판’을 붙여 고액의 몸값을 요구한다. 한국 선수를 보유한 외국팀들도 이 점을 잘 안다. K리그 팀들이 외국에서 뛴 자국 선수들을 높게 평가한다는 것을 알고 엄청난 이적료를 챙기려 한다.
한일 월드컵 직후 유럽에 진출했다가 국내로 돌아온 D는 K리그 이적 시장에 낀 거품을 단적으로 보여준 선수다.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으로 유럽 명문 구단들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던 D는 이적료 2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유럽에 갔다. 유럽에서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하는 듯했던 D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후보 선수로 전락했고 결국 K리그 복귀를 선택했다. D를 벤치에 앉히며 기용 의사를 보이지 않던 유럽구단은 국내 모 구단이 D를 원하자 이적료로 300만 달러를 요구해 뜻을 이뤘다. 이 구단이 유럽 내 다른 구단이 D를 원했을 때도 300만 달러를 받을 수 있었을까. 어림도 없다. 이름값에 홀려 하향세에 있는 선수에게 많은 돈을 주는 유럽 구단은 거의 없다.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 소속으로 2004~2005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펄펄 날던 이영표가 잉글랜드 프리미어십 토트넘 홋스퍼로 이적하면서 기록한 이적료가 260만 달러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잉글랜드 프리미어십의 명문 구단으로 이름을 날렸던 리즈 유나이티드는 지금 챔피언십(2부 리그)에 있다. 챔피언십에서도 강등권에 있는 터라 다음 시즌부터 리그 1(3부 리그)로 추락할지 모른다. 리즈는 생각 없이 지갑을 열다가 파산한 팀이다. 성적에 집착해 선수 영입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선수들의 몸값에 거품이 낀 K리그에서 ‘제 2의 리즈’가 안 나오리란 법이 없다. K리그 연봉 구조에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광열 스포츠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