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한명 씨는 “여리고 정 많은 홍만이가 K-1 진출을 발표한 데는 나도 모르는 ‘뭔가’ 있을 것이기에 믿고 존중했다”고 밝혔다. | ||
아들의 이런 성장을 때론 가까이서, 또 때론 멀리서 지켜본 아버지는 아들이 유명해지는 것도 좋지만 부디 부상 없이 링 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랄 뿐이다. 최홍만의 아버지 최한명 씨가 말하는 ‘별들의 탄생 신화’ 마지막회를 소개한다.
2002년 홍만이는 씨름 데뷔 후 최고의 해를 보냈다. 한 해 동안 아마추어 선수 신분으로 무려 6관왕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 해 제주에서는 홍만이를 위해 처음으로 전국대회를 유치했을 만큼 홍만이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대통령배씨름왕대회였는데 홍만이가 이 대회에서 우승했음은 물론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프로팀에서 홍만이를 가만놔둘 리 없었다. 탁월한 신체 조건에다 실력, 그리고 관중들을 끌어 모으는 다양한 ‘끼’를 발산하는 바람에 홍만이의 인기는 상승 가도를 달렸고 프로팀에선 서로 홍만이를 데려가기 위해 스카우트 전쟁을 벌였다. 대학에서 연습할 상대가 없다 보니 일찌감치 울산 현대 씨름단에 들어가 훈련을 했다. 현대 씨름단에서 홍만이를 영입하기 위해 울산 캠프로 불러 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홍만이는 계약금 4억 5000만 원에 연봉 4000만 원의 조건으로 LG와 입단 계약을 맺게 된다. 현대와 LG 사이에서 잠시 갈등이 있었지만 동아대 송미현 감독이 전격적으로 LG로 방향을 틀면서 홍만이의 진로가 울산이 아닌 서울로 향했다. 당시 항간에선 내가 홍만이의 계약을 진두지휘한다는 소문도 나돌았지만 그때는 모든 결정권을 감독에게 일임했기 때문에 난 그저 전화로 진행 상황만 듣고 있었을 뿐이다.
▲ 최홍만 데뷔전 경기장 전경. | ||
그러나 홍만이로선 막상 씨름단이 해체되면 씨름 외에 할 일이 없었다. 다른 팀이나 기업에서 홍만이를 중심으로 해서 씨름단을 인수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언제까지 기약 없는 입소문에 자신의 인생을 맡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샅바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고 살았다. 공부도, 배움도 없이 모래판에서 인생을 끝낼 것처럼 훈련에 훈련을 반복했던 생활을 하루 아침에 중단해야 하는 상황은 홍만이한테 견디기 힘든 ‘현실’이었을 것이다. 모래판에서 승리의 포효를 외치던 아들이 저녁 9시 뉴스에 선수들과 구호를 외치며 투쟁하는 모습으로 비치는 것도 너무나 생경스러웠다.
그런 외적인 현실과 내적인 갈등의 충돌 속에서 홍만이는 자연스럽게 다른 종목으로 눈을 돌렸고 이전부터 재미있게 지켜본 이종격투기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홍만이가 K-1 진출을 선언했을 때 씨름계는 발칵 뒤집어졌었다. 영구 제명, 천하장사 박탈 등 온갖 비난과 화살들이 홍만이를 향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마치 홍만이가 K-1에 진출해서 씨름단이 해체되기라도 한 양 다양한 목소리들이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난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어느 누구가 홍만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 있는지를. 살아갈 방법도, 장치도, 환경도 만들어 주지 않고 무조건 ‘투사’로 남아 선수단을 이끌어 달라는 요구는 참으로 비현실적인 외침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 또한 홍만이가 씨름이 아닌 이종격투기 선수가 된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얻어 맞는 걸 모르고 자란 아이라 치고 받는 격투기 세계에서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누구보다 살 떨리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사람이 홍만이었다. 밤 잠 설치고 눈물 흘려가며 진로를 결정하고 선후배들의 이런저런 비난들에 가슴을 쥐어뜯었을 이가 홍만이었다. 평소 여리고 정이 많기로 소문난 그 애가 독하게 마음먹고 K-1 진출을 발표한 데에는 아버지도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이기에 나라도 아들의 결정을 믿고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5년 3월 19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홍만이가 서울올림픽공원의 한 체육관에서 K-1 데뷔전을 치렀기 때문이다. 제주 한림읍에 거주하는 이웃들 30여 명이 단체로 서울로 원정 응원을 가서 현수막을 들고 열렬히 응원을 펼쳤다. 내 생애에서 그렇게 가슴 떨리고 긴장했던 순간도 없었다. 아내와 두 손을 맞잡고 홍만이의 경기를 지켜봤는데 두 손이 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로 흥분 상태였다. 다행히 홍만이가 데뷔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자신의 몸집만한 트로피를 들고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와 아내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K-1의 ‘햇병아리’에 불과한 초보 선수였지만 모든 역경을 딛고 K-1 무대에 당당히 서 있는 내 아들 홍만이가 너무나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당시 체육관을 찾은 수많은 관중들을 보면서 홍만이가 왜 그토록 K-1 무대에 서고 싶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홍만이는 K-1에 진출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 그 첫 번째가 바로 관중들의 열광적인 응원과 살아있는 함성이 그리웠던 것이다. 팬과 응원이 존재하는 한 홍만이는 숨쉴 수 있었다.
홍만이가 K-1에서 초특급 스타로 자리 잡아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크지만 데뷔전을 전후로 인생의 희로애락을 제대로 맛봤던 그때 그 감정들은 나도, 그리고 홍만이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홍만이 아버지 최한명, 그리고 최한명의 아들 홍만이. 이 관계는 ‘영원’이란 말이 존재할 수 있는 사이다. 아버지와 아들이기 때문이다. 결코 넉넉한 뒷바라지를 해주지 못하고 때론 아들의 속을 헤아리지 못해 본의 아니게 실망감을 안겨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 아들이 ‘평범하지 못해서’ 겪었던 아픔과 그걸 극복해 갔던 과정들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난 사랑하는 아들의 영원한 서포터스로 남을 것이다. 사랑한다 홍만아! 그리고 미안하다!
정리=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