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르셀로나올림픽 시상대에 선 황영조. | ||
황영조
8월 10일 새벽. 마침 56년 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옹이 일장기를 달고 월계관을 쓴 날짜와 꼭 같았다. 만 22세의 청년 황영조는 몬주익의 언덕을 거침없이 올랐다. 일본의 모리시타를 따돌릴 때는 한반도가 들썩였다. 황영조의 올림픽 남자마라톤 우승은 그 해 한국의 10대 뉴스에도 당당히 3위에 올랐다(동아일보). 그리고 20세기 한국 스포츠 10대 뉴스에서도 88올림픽과 2002년월드컵에 이어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할 정도였다(1998년 건국 50주년 특집기사·중앙일보). 한국 스포츠사에 있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세계 제패의 순간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일까. ‘선수 황영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우승과 같은 해 보스턴마라톤에서 한국 최고 기록을 세우며 전성기를 이어갔지만 96년 올림픽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하며 ‘은퇴’를 택하고 말았다.
마라톤화를 벗은 젊은 황영조는 부침이 많았다. 98년 IMF경제위기 때 종신이라던 코오롱 이사직에서 해임되는 수모를 당했다. 2001년 만 31세의 나이로 국민체육진흥공단의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숱한 구설에만 오르내렸을 뿐 아직 지도자로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 알베르빌 2관왕 김기훈은 한국 쇼트트랙 신화의 신호탄을 쏜 선수였다. | ||
유난히 큰 눈망울에 귀공자풍으로 생긴 스물다섯 살의 쇼트트랙 청년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뇌리에 남아 있다. 이제는 전 세계가 따라하는 ‘외발타기 주법’도 기억에 생생하다. ‘왕눈이’ 김기훈. 1992년 2월 21일 새벽 그는 한국 동계올림픽 역사를 새로 쓴 것은 물론이고, 세계 쇼트트랙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남자 1000m와 5000m 계주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한국은 이전까지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은커녕 메달도 못 땄다. 한국은 김기훈의 금메달 2개에 힘입어 동계스포츠 세계 톱10(종합10위)을 달성했다. 김기훈은 96년 릴레함메르올림픽 1000m에서 2연패를 달성했다. 김기훈의 쾌거는 인간승리 드라마였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다. 198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오른쪽 발목을 30바늘이나 꿰매는 큰 부상을 당해 재기불능이라는 의사의 판정을 받았지만 이를 이겨낸 것이다.
하지만 김기훈의 쇼트트랙의 신화는 너무도 쉽게 묻혔다. 수차례 대표팀 코치를 지냈지만 파벌대립이 극심한 빙상계에서 주위만 맴돌 뿐이었다. 특히 97년과 2002년 대선 때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해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다. 훌륭한 후배들이 끊임없이 나온 것도 신화를 퇴색시켰다.
김기훈은 “벌써 15년이 흘렀군요.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어요. 스포츠와 정치 모두 상식이 통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올림픽 금메달만 3개를 딴 이 세계적인 선수는 현재 작은 빙상클럽에서 동네 코치로 일하며 새까만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 여갑순은 바르셀로나올림픽 한국 선수단에 첫 금메달을 선사했다. | ||
92바르셀로나올림픽 개막 다음날인 7월 26일. 18세 한국 소녀는 좀처럼 마지막 10발째를 쏘지 못했다. 0점만 아니면 우승인데도 말이다. 긴장감이 극에 달했고 제한시간을 넘기기 직전 ‘딱’하는 소리가 났다. 마지막 점수는 9.8. 소녀가 웃음짓는 순간 세계적인 미녀 명사수 레체바(불가리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의 첫 금메달은 ‘갑순’이라는, 한국인에게 더없이 친숙한 이름을 가진 소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여갑순은 한국 사격의 올림픽 출전 사상 첫 금메달을 따냈다. 아직 소녀티를 벗지 않은 여고생 여갑순(당시 서울체고)의 풋풋한 모습에 많은 국민들이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15년이 지난 지금 여갑순은 초등학생의 학부모지만 아직도 공기소총을 놓지 않고 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94년 우승, 98년 은메달을 땄고, 국내 대회에서도 정상급 기량을 유지했지만 유독 올림픽 선발전을 통과하지 못했다. 92년이 처음이자 마지막 올림픽 무대였던 것. 98년 10월 사격선수 김세호 씨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잠깐 운동을 쉰 적은 있지만 아직 은퇴한 적은 없다.
2008베이징올림픽을 앞둔 올해 컨디션이 좋아지면서 둘째아이의 출산까지 포기할 정도로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16년 만에 다시 올림픽에 나가 여고생 여갑순이 아닌 아줌마 여갑순으로 금메달을 따겠다는 것이다.
유병철 객원기자 einer6623@empal.com